소명자
글ㅣ김강남 선교사(군포이주와다문화센터)

서이안(가명)과 그녀의 딸 문영(가명, 17세)이는 문영이가 7살 때 처음 센터에 왔다. 엄마도 전통적인 베트남 여성의 체형처럼 작고 아담했지만 문영의 체구는 5살 정도로 착각할 만큼 또래에 비해 작아 보였다.

내년이면 학교에 갈 나이인데도 얼마 전에야 겨우 젖을 뗐고 입이 짧아 편식도 심하고 잘 먹지 않았다. 그때는 7살이 되도록 젖을 물린 엄마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기구한 사연들로 문영의 평범하지 않은 정서적인 애착이 이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부모는 어린 문영 앞에서 그들의 갈등을 그대로 노출시켰기에 문영의 어린 시절은 늘 불안하고 무섭고 혼란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센터에서 만난 문영은 엄마와의 분리불안을 보이며 낯을 많이 가렸고 말수도 적었다.

그러다 초등입학 후에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한 학년씩 올라가면서는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센터에서 보이는 아이의 모습으로는 가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서이안의 이혼상담을 하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가정에서 엄마와 아빠 사이에 놓인 문영의 고충과 혼란을 심히 우려하게 되었다. 바람난 아빠는 들으란 듯이 문영 엄마를 비방하고 갖은 욕을 해댔다.

하지만 문영은 아빠가 엄마에게 하는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에 그 어떠한 반항(?)이나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재력이 있고 나이 많고 목소리 큰 아빠가 가정의 절대 권력이었고, 베트남에서 온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외국인 엄마는 절대 약자임을 자라면서 하루하루 체득했고, 어느 편에 서야 자신에게 유리하고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한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문영의 얼굴이 그나마 밝았던 것은 관심을 가지고 챙겨주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선은 우리 센터의 다문화가정자녀와 중도입국자녀들이 다니는 토요학교에 오면 변함없이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토요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며 놀아주는 멘토 언니(고등학생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인근 교회의 선생님이 집까지 오셔서 주일학교에 데리고 가 주셨다. 그 당시 군포센터에는 부산 인도네시아 교회처럼 한 국가교회가 아닌 다문화교회 즉, 다민족교회를 하고 있었다.

센터에 주일학교를 따로 열지 않았고 교회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기에 자녀가 있는 결혼이민자들은 주변 주일학교의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다.

우리 토요학교에 나오던 다문화가정 자녀는 대야미의 한 교회 선생님이 거의 싹쓸이를 하였다. 난 교회에 열정 있는 한 사람의 역할과 힘이 대단히 놀랍다는 것을 이때 확실히 깨달았다.

요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데리러 가가호호 방문하지 않는다. 대야미교회 선생님은 주일 아침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배드리고 점심먹이고 오후 활동까지 한 다음 서너 시쯤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처럼 일하는 엄마들은 일요일 오전 이 선생님 때문에 제대로 쉬었다. 함께 교회에 가는 엄마도 있지만 아이만 보내는 경우 선생님은 엄마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문영도 5학년 때 엄마가 안산의 이주여성쉼터에 입소하기 전까지 내내 이 선생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쉼터는 가톨릭 재단에서 여성가족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곳이었다.

2년간 지냈던 그곳에서는 교회에 갈 수 없었고 모든 생활이 관리 수녀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동생이 태어났다. 이후 엄마아빠의 이혼 판결이 나고 재산분할로 받은 의왕 소재의 아파트에 들어갈 즈음 문영은 중학생이 되었다.

엄마가 양육권을 가져왔기에 아빠가 두 딸의 면접교섭권을 가졌다. 아빠는 면접교섭권이 우습게 툭하면 전화하고 찾아오고 아이들 양육에 관여했다. 아빠를 만날 때마다 엄마를 향한 아빠의 비난은 늘어만 갔고 문영은 세뇌되다시피 하여 점점 엄마에게 반항하고 엄마를 무시하는 딸로 변해갔다.

사춘기 딸은 엄마와의 갈등이나 집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까지 고스란히 아빠에게 전달하였고 아빠는 딸의 고자질과 하소연을 듣는 즉시 서이안에게 전화해서 ‘너가 엄마가 맞냐, 너는 딸을 괴롭게 하지 말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줘라’는 등의 도넘은 폭언과 간섭을 해댔다.

이혼했지만 문영을 통한 아빠의 개입은 엄마와 딸의 삶을 점점 더 비극으로 몰고 갔다. 문영을 이리 만든 데는 무엇보다 아빠의 용돈 공세가 컸다. 결국 문영과 엄마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문영은 근거없는 ‘아동학대’로 엄마를 경찰에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아빠는 이때다 싶었는지 양육권 반환 소송을 했다. 문영도 아빠와 살고 싶어 했다. 문영은 아빠가, 동생은 엄마가 키우고 동생의 양육비조차 일절 받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 문영은 어린 시절 살던 농장에서 아빠와 살게 된 지 3개월 만에 다시 아빠를 경찰에 신고했고 청소년 쉼터에 들어갔다.

돈 많은 아빠와 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갈등이 커졌고 아빠도 ‘아동학대자’로 신고된 것이었다.

문영이 쉼터에 들어간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무엇부터 어긋난 것일까? 다문화사회를 표방하며 속성 국제결혼을 허용했던 정부가 문제인가, 이 가정의 문제인가. 답답해서 또 하나님을 불러본다. 그녀, 서이안의 딸이지만 우리의 딸이기도 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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