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자
글ㅣ김강남 선교사(군포이주와다문화센터)

 

서이안(가명). 그녀의 이전 베트남 이름은 나도 모른다. 예전에 얼핏 들었는데 좀 어렵게 여겼던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한국에 온 것은 18년 전이다. 23세 연상의 남편은 재혼에다가 전처로부터 얻은 두 아들이 있었다. 그 당시 큰 아들은 대학생이었고 둘째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남편은 전라도 시골마을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깡촌 출신이었으나 경기도에 올라와 부지런히 돈을 모아 산을 샀는데 그것이 대박을 쳐서 갑자기 몇 십억 부자가 되었다. 그 후 대부업을 하면서 재산은 계속 불어났다. 빌라도 있고 아파트도 있었지만 생활은 산속 농장 안의 허름한 농막에서 살았다. 그렇게 서이안도 그 농막에서 첫 딸을 낳고 농장 허드렛일을 하며 닭과 농장 안의 과실나무들을 키웠다. 남편은 주로 농장 밖의 일을 보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고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버는 여느 결혼이민자들과 달리 농장 일을 하느라 벌이가 없었던 서이안은 남편이 주는 카드 한 장으로 버텼다. 말이 카드지 카드 사용내역은 딸아이 기저귀 하나를 사도 남편에게 문자로 전송되었다. “어디에 있냐, 왜 샀냐, 돈 아껴라.” 등 갖은 질문과 고문을 해댔고 다문화센터에서 뭐하나 배우는 것도 외출을 싫어하는 남편 탓에 농장을 벗어나는 일은 삼가야 했다. 


그러던 중 딸아이가 5살쯤 되었을 때 남편은 어떤 여자를 농장에 데리고 와서는 자기가 사귀는 여자니 잘 대접하라고 했다. 그 여자는 대놓고 서이안을 무시했고 남편의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편의 저의는 이혼이었다. 서이안이 쉽사리 응하지 않자 남편은 멀쩡한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붙여 강제입원 시켰다, 딸아이는 매일같이 울며 엄마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20일 정도 후에 겨우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딸아이가 학교에 가면서부터는 농장을 나와 학교가 가까운 빌라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때도 남편의 공공연한 외도는 계속되었다. 딸아이가 4학년이 되자 남편은 공식적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협의이혼을 해 주지 않자 남편은 변호사를 통해 재판이혼을 청구했다. 서이안은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파렴치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과 하나뿐인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재판을 통해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좋은 변호사가 필요했다. 

모든 인간관계는 그 의미가 있는 법. 나는 그 당시 대학원 인권법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우리도 재판이혼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자동차 블랙박스, 녹음, 주변 사람들 증언 등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남편의 외도를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곧 끝날 것이라 여겼던 재판이혼은 3년이 걸렸다. 1년은 남편과 한 빌라에 지내면서 버텼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지옥 같은 그곳을 나오기도 어려웠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날도 수면제를 먹고 약에 취해서 자고 있는데 남편이 밤늦게 몰래 방에 들어왔다. 2개월 후 임신사실을 알게 됐고 더 이상 그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안산에 있는 이주여성 긴급지원 쉼터에 딸아이와 함께 입소했다. 최장 거주기간인 2년 동안 쉼터에서 지내면서 둘째 딸을 출산했고, 큰딸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됐고, 이혼 재판도 판결이 났다. 판결은 위자료 3천만 원, 재산분할 3억 5천만 원(아파트로 대신함), 양육비(두 딸에게 매월 80만 원씩 160만 원) 등 그녀가 한 부모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남편은 한 달에 두 번 딸아이의 면접교섭권을 얻었다. 

나는 서이안의 이혼 전 기구한 삶과 이혼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하면서 서이안이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인정했다. 강한 정신력,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는 지혜 등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어리숙한 결혼 이민자의 것이 아니었다. 제일 다행이었던 일 중 하나는 서이안이 국적을 일찍 취득한 것으로 법적인 불리함을 극복한 부분이었다. 서이안의 한국어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고 진솔하게 전달했기 때문에 진술서를 대신 작성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엇보다 서이안은 서두르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기에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기다림으로 잘 지나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틈만 나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에 대해 서이안과 나누었다.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한 베트남 출신인 서이안은 그 어떤 신도 쉽게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나는 서이안에게 어려운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기도했고, 그녀에게도 권했다. 그녀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굽이굽이 회심의 기회가 있었을 법한데도 거부하는 서이안에게 과연 하나님의 때는 언제일까 궁금했다. 서이안은 이제 자기 명의로 된 아파트에서 두 딸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 끊임없이 불어왔던 인생의 풍파가 이제는 다 지나간 것일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라면 부르심에 응답할 때까지 그녀의 풍파는 끝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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