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과 목회자 칼빈

▲황대우 교수
▲황대우 교수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 도시의 종교개혁자로 유명하다. 칼빈의 이름은 본래 불어로 여앙 꼬뱅(Jehan Cauvin)인데, 꼬뱅을 라틴어 ‘칼비누스’(Calvinus)로 개명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칼빈을 불어로는 쟝 꺌뱅(Jean Calvin)이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은 라틴어 칼비누스를 다시 불어로 고쳐 부른 것이다. 독어로는 요하네스 칼빈(Johannes Calvin), 영어로는 좐 캘빈(John Calvin)인데, 우리에게는 ‘존 칼빈’ 혹은 ‘요한 칼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존 칼빈’은 영어 이름의 영국식 발음 같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영국식 발음 ‘존’과 독일식 발음 ‘칼빈’의 조합이다. 칼빈에 대한 대한민국 외국어표기에 따른 공식 이름은 ‘장 칼뱅’(Jean Calvin)이다. 우리나라에서 칼빈은 이것만으로도 참 복잡해 보인다. 부정적으로 이름 비틀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칼빈’이란 이름은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1. 칼빈의 성장과 회심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도시 누와용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세부터 내려온 전통적 교육과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인문주의 교육을 동시에 받으며 성장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여 무사히 졸업했다.

어쩌면 그가 가진 유일한 면허증은 법학 졸업장, 즉 법학 교사 자격증일 것이다. 칼빈처럼 루터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들어갔으나 천둥번개 치는 날 했던 자신의 맹세 때문에 일찌감치 그 길을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대학의 법학도가 되는 것은 신분 보장 내지는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어릴 때부터 첫째 아들 샤를르보다 훨씬 공부를 잘 했던 둘째 아들 쟝, 즉 칼빈에게 아버지 제라르 꼬뱅(Gérard Cauvin)이 거는 기대는 매우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똑똑한 둘째 아들이 만 12살이 되던 1521년에 제진느 성직록(장차 성직자가 될 아이에게 지급하는 장학금의 일종)을 받게 함으로써 신학도의 길을 가도록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성직장학금을 받은 1527년경에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전공하도록 종용했고 순종적인 아들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입학했다.

천부적인 ‘뛰어난 이해력과 훌륭한 암기력’ 덕분에 법대 시절 칼빈은 학생으로 배우는 신분이었지만, 동시에 정규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이기도 했다. 비록 1532년경 칼빈이 결국 법대 졸업장에 해당하는 법률면허증을 받음으로써 법학도에서 법학자의 자격을 인정받는 법률면허소지자가 되지만, 법학자로서 출세하기를 바라던 아버지가 1531년에 갑자기 죽음으로써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칼빈은 당시 유행했던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자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저술한 학문서적은 로마 철학자 세네카가 쓴 ‘관용’에 관한 짧은 글을 주석한 해설서였다. 1532년에 출판된 이 책은 칼빈이 출판을 위해 자신의 재산 전부를 투자할 만큼 야심작이었고 그의 출중한 인문적 실력을 뽐내고 싶을 만큼 성공적인 반응을 기대한 수작이었으나, 뜻밖에도 그의 기대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맛 본 인생의 첫 실패였는지 모른다.

1534년에는 칼빈이 자신의 성직 장학금을 포기했고, 죽음 이후 영혼도 잠들게 된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를 반박하는 자신의 기독교 처녀작 ‘영혼불면’(Psychopannychia)을 저술했는데, 칼빈의 회심은 거의 확실히 이 두 사건 이전의 어느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시편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회심을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갑작스러운”으로 번역된 라틴어 단어 ‘수비타’(subita)는 사실 ‘예기치 않은’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만일 후자의 의미일 경우 칼빈의 회심은 한순간에 경험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 동안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칼빈의 회심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분하지만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칼빈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특별한 회심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칼빈의 회심이 사도 바울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는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물론 그것이 오늘날 알려져 있는 다른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종류의 회심과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칼빈의 회심은 로마 가톨릭 신앙에서 종교개혁 신앙으로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즉 로마 가톨릭교도에서 개신교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왜 로마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종교개혁 신앙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칼빈이 회심 이전에는 교황제도 속의 미신적 관습과 신념에 빠져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불경건하고 미신적인 무리 속에 흩어져 사는 소수의 신자들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롭고 바른 것인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대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열심히 용기 있게 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기를 원하지만, 더 나은 것을 할 수 없다면 가능한 거기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자신의 권유대로 미신적인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탈출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앙 속에 살아가는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죽음의 보복의 대가로 얻는 현실적인 안락함보다는 차라리 궁핍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의 희망을 신뢰하면서 각자의 소명에 따라 거룩하고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강권했다.

1533년 새 학기에 칼빈의 친구 니꼴라 꼽이 파리 대학의 학장 취임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어 이 연설문을 작성해준 칼빈뿐만 아니라, 꼽과 그의 다른 친구들까지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 칼빈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숨어 지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1534년 10월에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전단지 유포 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François I)가 개신교도들을 전국적으로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칼빈은 더 이상 조국 프랑스 내에서 안전지대를 발견할 수 없었고 결국 외국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도망자 칼빈,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다

도망자 신세가 된 칼빈은 자신의 친구 루이 뒤 띠예의 집에 은거하면서 자신처럼 개신교 신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핍박 받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신앙이 결코 이단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임을 변호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리고 급하게 작성하여 출판한 것이 저 유명한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은 1536년에 출판되었으나 이미 1535년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책으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 즉 스타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칼빈의 유명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기독교강요’ 출판 후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시 발발한 전쟁을 피해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우회로에 있던 도시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들렀는데, 그곳이 바로 제네바였다.

‘기독교강요’의 유명세 덕분에 그는 그날 밤 예정에 없던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기욤 파렐의 방문을 받게 되었고, 자신을 제네바에 잡아두려는 파렐의 설득이 저주 섞인 협박으로 변하자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에 결국 제네바에 남아서 도시의 종교개혁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칼빈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뜻을 꺾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

제네바의 개혁자가 된 칼빈은, 비록 제네바 출신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름 대신에 무시하는 호칭 ‘저 프랑스인’(ille Gallus)이라 불리며 푸대접을 받았지만, 파렐과 함께 제네바를 경건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1537년 파렐은 칼빈과 함께 ‘제네바 도시의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칼빈과 파렐은 모든 제네바 시민이 이 신앙고백에 서명함으로써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네바 출신 지도자들에게는 칼빈과 파렐의 이런 강경한 태도가 너무나도 못마땅했다.

1538년 1월에 칼빈과 파렐의 주도로 제네바 목사들이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은 시민들을 성찬식에서 제외하자 화가 난 제네바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충고를 무시한 두 개혁자를 제네바 도시로부터 추방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도망자가 되었던 칼빈은 이제 제네바 도시로부터 추방당한 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3. 쫓겨난 칼빈, 뜻밖의 행복을 누리다

추방된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 도시의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이웃 도시 베른으로 곧장 가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명하고 해결책을 요청했으나 별 도움을 얻지 못했고 쮜리히에도 들렀으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바젤로 가게 되었다.

파렐은 뇌샤뗄에 목사로 청빙을 받아 갔고, 칼빈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위해, 그리고 ‘기독교강요’의 증보를 위해 바젤에 남기로 했다. 스트라스부르로 와달라는 몇 차례 초청을 거절한 칼빈에게 부써는 마지막으로 파렐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저주 섞인 협박은 이번에도 통했다.

칼빈은 개인적으로 스트라스부르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까봐 두려워서 결국 오고야 말았다. 칼빈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시달렸던 중압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학문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바젤을 떠나 부담스럽고 무거운 마음으로 1538년 9월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400-500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뜻밖에도 칼빈은 이곳에 머문 2년 동안 줄곧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은 18개월 동안 긴장의 연속이었던 제네바 생활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칼빈은 소도시 제네바에서 쫓겨났으나, 그의 경건과 실력을 잘 아는 부써 덕분에 대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1539년 2월부터는 1538년에 설립된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Gymnasium)에서 신약을 가르치는 성경 교수 사역도 병행했다.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넉넉한 생활비도 받았고, 이곳에 온지 10개월만인 1539년 7월 29일에는 스트라스부르 시민권도 받았다. 드디어 칼빈은 당대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스트라스부르 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1540년 8월에는 재세례파에서 개종한 과부 이델레뜨 드 뷰러(Idelette de Bure)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혼 주례를 맡은 파렐은 그녀를 “품위 있고 정직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표현했다. 칼빈의 행복이 어디 이뿐이었는가? 목사로서 칼빈은 이곳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에서 처음으로 월 1회 성찬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권징조례에 따라 강력한 권징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개혁교회 찬송가인 ‘음악에 맞춘 시편과 노래’ 선집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1539년에는 ‘기독교강요’도 개정 증보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은 자신이 바젤에 머물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1540년 3월에는 칼빈의 최초 주석 ‘로마서주석’을 출판하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 생활을 통해 칼빈은 “학식이 풍부하고 경건한 전문가로 불리는 프랑스인”으로 알려졌다.

4. 칼빈이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간 까닭은?

왜 칼빈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던 유쾌한 대도시 스트라스부르를 버려두고, 자신을 무시하고 쫓아냈던 불쾌한 소도시 제네바로 다시 돌아갔는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또 왜 제네바는 스스로 쫓아낸 목회 실패자 칼빈을 다시 청빙하게 결정했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다.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칼빈은 제네바 시절을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치를 떨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종종 기욤파로부터 제네바 정부와 새로운 목사들에 대한 불평어린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목사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하여 그들의 부족함이 보일지라도 그들에게 순종할 것을 충고했다. 멀리서도 칼빈은 제네바교회가 바로서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마음으로 상담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파렐도 제네바에서 칼빈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갈 것을 수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이번만큼은 파렐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은 파렐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것이다. “만일 제게 선택권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만 당신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당신의 말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제 심장을 도살된 것처럼 주님께 희생제물로 바칩니다.” 바로 이 편지의 내용으로부터 칼빈의 문장, 즉 오른 손에 심장을 들고 바치는 문장이 나오고, 이 칼빈의 문장이 미국 칼빈 대학의 문장이 되었고, SFC(학생신앙운동)의 배지가 되었다.

칼빈은 죽어도 제네바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지만, 이것을 선택하는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고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목회자 칼빈은 자신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달렸음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칼빈이 대도시 스트라스부르의 편안하고 행복한 환경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소도시 제네바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된 단 하나의 가장 분명하고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것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인정이나 고백이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제대로 바친 자가 아니면 진정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고신교단을 위해, 아니 한국교회를 위해, 나아가 칠흑같이 어두운 이 시대를 밝히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길들인 사람 칼빈과 같은 신앙인, 칼빈과 같은 목회자를 오늘도 찾고 계신 것은 아닐까?

글·황대우 교수

고신대 교양학부 교수와 진주북부교회

기관목사로 섬기고 있는 필자는 개혁주의 신앙인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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