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인 동시에 삶의 개혁!

15171031, 신학적인 토론을 제안하는 루터의 ‘95개 조항은 사실상 중세 로마교회의 교리가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즉 루터는 ‘95개 조항을 통해 중세의 잘못된 기독교 교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예컨대, 성경의 회개는 고해성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교황에게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벌을 사면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것, 면죄부 판매는 형벌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기만행위라는 것,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자신의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참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교회의 모든 유익에 참여하는 것은 면죄부 없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는 것, 면죄부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면죄부 판매가 탐욕의 결과이며 돈을 긁어모으는 수단이라는 것 등을 지적했습니다.

‘95개 조항의 토론문에서 루터가 주로 비판하는 교리는 면죄부교황입니다. 여기서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라는 중세교회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15184월에 루터는 자신이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총회에 참석해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했는데, 이 논제를 흔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이신칭의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삶의 가장 건전한 지침이지만 사람을 의의 길로 가게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행위가 없어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란 기독교의 주요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원했던 것은 잘못된 교리의 개혁이었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이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리의 개혁은 단순히 가르치는 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행위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해 삶의 개혁으로까지 확대된 운동입니다. 즉 종교개혁은 먼저 기독교 교리를 회복하는 운동이었고, 이 교리에 일치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회복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회복운동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칼빈은 교리, 즉 성경의 가르침을 기독교의 영혼, 교회의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칼빈에게 교리 없는 기독교는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 건설을 위해 기독교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주 분명하게 상기시켜줍니다. 따라서 교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는 현상도 건전한 교리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이 부실하고 상하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에 공급돼야 할 영적 양식은 영양도 부족하지 않아야 하고 상태도 신선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리는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적일 수도 없고 인간 중심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포되는 설교의 교리는 안타깝게도 하나님 중심적이기보다는 청중 중심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강단의 설교가 교리적으로 부실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많은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바른 교리 없는 삶은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높이 쌓을수록 빨리 무너지고 심하게 부서집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은 교리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성경적인 신학과 하나님 중심적인 강단 설교를 통해서만이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습니다. 물론 교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기독교 교리도 역시 살아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삶을 통해 실천되지 않는 교리는 화려하지만, 생명력 없는 조화(造花)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틴 부써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참된 신학은 경건하고 복되게 살기 위한 지식입니다.” 또한 참된 신학이란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활동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참된 신학이라면 이것은 분명 살아 있는 신학이요 살리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라는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모두가 신학자가 돼야 합니다.

황대우 교수 / 고신대학교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