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2)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를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로 전락시킨 두 번째 오해는 믿음을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단, 즉 결심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분명 확신(assurance)의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개인의 신념은 서로 다릅니다. 구원하는 믿음과 개인적 확신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요소가 개인의 확신에서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구원하는 믿음에서는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의 객관적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혹자는 개인을 위한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합니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정상적인 개혁주의라면 이신칭의 교리를 개인주의의 도구로 왜곡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회가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최권능 목사로 더 잘 알려진 최봉석 목사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일그러뜨리는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는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란 구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저 교리와 구호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활용함으로써 폭발적인 교회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 구호의 만남은 한국교회를 성장시키는 황금 알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부흥이란 황금 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는 가까운 이웃교회일수록 경계심을 갖게 되는데, 이 경계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움과 적대감으로 쉽게 변질됩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민낯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다!’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치 세포분열 하듯이 분리를 밥 먹듯이 해온 한국교회가 하나이기는 고사하고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와 같은 교회 분쟁과 분열의 실제 원인이 교회의 본질과는 무관하고 대부분 부패한 인간 본성의 욕심과 이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4:1)고 반문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대입니다. 교회 갈등의 주요 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요?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귀다툼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오히려 격려와 협력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교리를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국밥이 아니라, 서로 한 몸을 이룬 공동체라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의 지체, 즉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교회가 없고 다른 교회의 성도가 없다면 우리 교회도 없고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입니다. 지상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해도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의 일부입니다.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수록 다른 지체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크든 작든 지상교회 가운데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모든 지상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를 돕고 돌볼 때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교회로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황대우 교수 / 고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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