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기념교회 ‘웅천교회’, 세계적인 순교자 소양 주기철(朱基澈) 낳아

교회 내 ‘주기철목사 순교기념관’ 조성, ‘주기철 목사 성지 순례길-헌신하길’

▲ 웅천교회당 전경 2020.08.09 cookie0228@hanmail.net
▲ 웅천교회당 전경 2020.08.09 cookie0228@hanmail.net

▲ 교회 입구 '헌신하길'(주기철 목사 출신교회) 안내판(왼쪽)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오른쪽)
▲ 교회 입구 '헌신하길'(주기철 목사 출신교회) 안내판(왼쪽)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오른쪽)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49(남문동)에 있는 웅천교회(담임목사 오성한) 도로변 입구에는 ‘헌신하길’이라고 적힌 큰 간판에 ‘일사각오(一死覺悟,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번 죽을 각오를 하다)’라는 글귀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웅천교회는 바로 진해가 낳은 세계적인 순교자 소양(蘇洋)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출신교회입니다.

웅천교회는 고신총회로부터 2011년 9월 제61회 총회에서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됐습니다. 웅천교회 입구 쪽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교회 내에 ‘주기철목사 순교기념관’이 조성돼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 성지 순례길이 ‘헌신하길’(웅천교회)를 비롯해 ‘묵상하길’(주기철목사기념관), ‘기억하길’(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사랑하길’(마산문창교회)로 연결돼 있습니다.

▲ 웅천교회 내 주기철목사 순교기념관에서 설명하는 오성한 목사
▲ 웅천교회 내 주기철목사 순교기념관에서 설명하는 오성한 목사


7월 9일(목) 현재 웅천교회의 담임인 오성한 목사를 만나 일사각오로 살았던 주기철 목사의 삶과 생애와 함께 웅천교회가 순교신앙을 어떻게 계승해가고 있는지 들어봤습니다. 주기철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입니다.


기복,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주기복은 1897년 11월 5일 당시 경상남도 진해시 북부동, 백일동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복의 아버지 주현성은 마을의 유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복은 8살 나이인 1906년 3월 10일 집안의 형뻘 되는 주기효가 웅천에 세운 개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진해 웅천은 태종 7년 1407년 동래의 부산포와 웅천의 내이포가 일본에 개항된 이후 1510년 삼포왜란, 1592년 7년간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치욕의 현장이 됐습니다. 웅천은 일찍이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기독교가 들어오고 외국에 문이 열렸으나 아픔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오성한 목사는 웅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500년에 걸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이곳 웅천은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많은 교훈을 줍니다.”


기복의 온 식구들, 믿음의 길로 들어서다

기복이 태어난 지 3년이 지난 1900년 웅천 땅에 웅천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김원수가 성내리 자가에 십자가를 세우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습니다. 주씨 가문의 큰형 주기원이 1907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해 온 식구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웅천교회에 있는 당시 생명부 기록에 의하면 기복이는 1910년 12월 25일 형님의 권면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즈음해 웅천읍교회(당시 교회 이름)에 출석하게 됐으며, 예수를 믿은 지 4년 만에 기복의 전도로 그의 아버지 주현성은 1914년부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기복은 13세의 나이인 개통학교 5학년 때에 웅천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 신앙심을 키우며 큰 꿈을 품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가장 신나게 불렀던 노래를 볼 때 이곳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강렬한 마음을 길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복이 웅천교회에 나간 지 2년 후에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장대리 춘원 이광수(당시 21세)가 전국 순회강연 차 부산에 왔다가 마산으로 가는 길에 웅천 개통학교를 들렀습니다. 이때 기복은 그의 연설을 듣고 오산학교의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은 당시 105인 사건으로 투옥됐습니다.


기복에서 기철로 개명, 오산학교 졸업


▲ 오산학교 교사 전경
▲ 오산학교 교사 전경
“기복이 15세경 1913년 봄 오산학교에 진학할 즈음 개명합니다. 기복에서 기철로 바꾼 것입니다. ‘주기철’의 뜻은 ‘주님의 기독교를 철저히’라는 의미가 포함돼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2년 만에 이러한 철저한 신앙심이 길러진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웅천교회가 당시에 신앙교육을 잘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 주기철 목사와 안갑수 사모
▲ 주기철 목사와 안갑수 사모
주기철은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만납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승훈은 1907년 12월 24일 정주에 학교 문을 열고 이름을 오산(五山)이라고 했는데, 이는 주변에 남산, 천주산, 제석산, 황성산, 연산 등 다섯 산이 보초를 서고 있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남강이 44세 때의 일입니다. 오산학교에서 산정현교회 장로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만납니다. 그가 크게 영향받은 스승입니다.


주기철에게는 고실적인 눈병이 있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4년 동안 눈 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를 7회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여러 선생의 권유로 서울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주기철은 이 학교에서 1년간 공부할 즈음인 1916년 안질의 악화와 생활고로 길이 아님을 깨닫고 학업을 중단한 채 웅천으로 낙향했습니다.


웅천에서 청년운동과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했으며, 1917년 가을 안갑수와 중매로 결혼합니다. 1919년 4월 3일 성내리 만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릅니다.


평양신학교 졸업, 3개 교회 사역자로


▲ 평양신학교 신 교관
▲ 평양신학교 신 교관


당시 길선주 목사와 함께 기독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김익두 목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던 가운데 마산에 왔습니다. 주기철은 1920년 5월 27일 마산문창교회 김익두 목사 사경회에 참석해 큰 은혜를 받아 신학교 입학을 결심하고(헌금 5원), 19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재학하는 가운데 양산읍교회(현 양산교회)를 전도사로 섬겼습니다.


주기철은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고, 1926년 봄 부산초량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이어 28살에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됐습니다. 이 교회를 시작으로 마산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각각 5년 정도씩 사역하고 1944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습니다.


부산초량교회, 삼일유치원 개원…인재 양성


▲ 선교사님들과 함께
▲ 선교사님들과 함께
주기철의 초량교회 사역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게 유치원의 개원입니다. 삼일유치원입니다. ‘삼일’은 ‘삼위일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초량교회에 삼일유치원이 있습니다. 1931년 3월 20일 제1회 유치원생 10명을 배출했습니다. 또 성경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당시 젊은 나이인데, 어린 세대들을 가르치고 예수의 복음을 심어야 일본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강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볼 때 굉장한 중요한 기점입니다.”
주기철이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제안했는데 통과됐습니다. 이때 주기철은 목숨을 걸고 일본 정부에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바로 일사각오의 정신입니다. 이 일로 주기철은 갑자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서 일본인들에게는 문제의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평양신학교 사경회 마지막 날, ‘일사각오’ 설교


▲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주기철은 1931년 7월 하순 부임한 마산문창교회에서도 미래에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교회당이 멀어서 교회까지 오기 힘든 아이들을 위해서 교사를 양성, 파송해 마산 시내에 10여 군데 가정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주기철은 주일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분을 단순히 순교자로 알지만, 삼일교회와 마산문창교회에서 진행한 그의 어린이 사역을 볼 때 교회교육과 사회교육에도 굉장히 앞장섰습니다.”마산문창교회에서 주기철의 부인 안갑수 사모가 갑자기 별세했습니다(34세). 그래서 오정모를 만나 다시금 결혼합니다. 오정모는 주기철이 평양형무소에 5번 갔다 왔다 할 때 내조를 잘하고 믿음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35년 12월 평양신학교 사경회 마지막 주기철의 ‘일사각오’(요 11:16)라는 제목의 유명한 설교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일사각오’, ‘남(이웃)을 위해 일사각오’, ‘부활의 진리를 위해 일사각오’가 그것입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교

▲ 산정현교회 교직원 일동
▲ 산정현교회 교직원 일동

주기철은 1936년 7월 마지막 목회지인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합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1937년 3월 7일 신축을 위한 설교(‘많이 준 자에게 많이 취하심’ 눅 12:11~48)와 함께 예배당을 신축했습니다.


“당시 분위기 속에서 산정현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다시 짓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일본에 대한 항거입니다.”


▲ 산정현교회 새로 지은 교회당(250평)(왼쪽)과 구 교회당
▲ 산정현교회 새로 지은 교회당(250평)(왼쪽)과 구 교회당
이 예배당을 짓기 시작한 다음 해인 1938년 2월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서는 신사참배 찬성이 결정됐습니다. 같은 해 2월 8일 새로 지은 산정현교회 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리는 날 주기철은 입당예배를 드리러 가는 도중에 일본 순사들에 의해 강제 연행됐습니다.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지 약 1년 6개월 만에 체포되기 시작해 순교의 날까지 5차례 감옥에 가면서 고통의 길을 걸었습니다.


1938년 8월 주기철이 세 번째 6개월 투옥됐다가 나온 1939년 2월 5일 ‘5종목(五種目)의 나의 기원(도)’라는 제목의 설교는 교인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설교를 할 때 온 교인들은 눈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가 그 설교 내용입니다.


▲ 주기철 목사 장례식 광경 (옛 사진들 웅천교회 제공)
▲ 주기철 목사 장례식 광경 (옛 사진들 웅천교회 제공)
1940년 3월 24일 산정현교회 새 예배당이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로 일본에 의해 폐쇄됐습니다. 같은 해 6월 초 주기철은 마지막으로 구속됐으며, 1944년 4월 21일 부인이 마지막으로 면회하고 주기철이 최후 유언한 뒤 5년 4개월 옥고 끝에 순교했습니다. 같은 해 4월 25일 평양 돌박산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1947년 1월 27일 그의 부인 오정모도 유방으로 별세했습니다.


주기철의 생애는 3기로 나뉩니다. 1기 구국염원(九國念願) 민족주의자의 길, 2기 구령염원(救靈念願) 교역자의 길, 3기 순교염원(殉敎念願) 일사각오의 길입니다.


“순교의 길, 내 안에 복음을 누리는 것”

주기철은 믿음의 후세들에게 남긴 게 있습니다. 바로 ‘일사각오’입니다. 오 목사는 ‘오늘도 이 시대에 맞는 일사각오가 필요하다.’라고 제기합니다. 주기철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나라를 사랑하며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주기철은 불교, 유교가 찌든 곳에서 예수를 믿고 스스로 ‘주님의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는 각오로 15살 나이에 이름을 바꾸고 평생 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 복음은 청소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와 함께 주기철 목사는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 중점적으로 목회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복음과 순교 정신을 심는 것은 이제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 목사는 다음 세대에게 순교 정신을 심는 데는 알고 가르치는 것으로만 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을 알고만 가르치면 능력이 없습니다. 누리는 복음이 돼야 합니다.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복음으로 인해 행복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될 때 사랑의 행복이 넘치기에 누리는 복음이 됩니다. 복음으로 행복하니까 밥을 먹다가도 예수님의 방법처럼 나도 모르게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전하고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나 혼자 역부족이고 더 빨리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보내는 복음을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고 이웃교회를 돕고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해야 합니다.”

주기철은 기쁨으로 순교를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아팠지만, 기어이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 마음에 행복으로 누려줬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순교는 이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복음을 누리는 것”이라고 오 목사는 말합니다.

웅천교회는 주기철의 일사각오와 순교 정신을 계승해가기 위해 예수님 때문에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 간판에는 ‘행복의 문이 반드시 열립니다’라는 표어가 큰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알게 하면 행복의 문이 반드시 열린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바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어 합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고 싶은 성도가 많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할 때 틀림없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부흥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헌신과 순교가 우리 교회 안에 흐르는 영적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런 자부심과 함께 복음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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