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와 헌금 생활

▲곽수관 목사
▲곽수관 목사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의 보고를 여는 열쇠라고 우리는 믿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십일조 쟁점은 정통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단골 메뉴가 돼버렸다.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 아니 아예 십일조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요, 바람직한 교회인 것처럼 주장한다. 많은 교인에게도 십일조는 뜨거운 감자이다. 신앙 성장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지만 많은 이가 그 앞에서 시험(?)을 받고 등을 돌리고 떠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과연 십일조는 무엇인가?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모든 헌금생활의 기초이기도 하다.

1. 십일조, 폐기돼야 할 율법인가?

성경에서 십일조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4장이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9~20).

제사장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이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드린 것이다. 또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을 때,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2)라고 십일조 생활을 서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처럼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당연히 따라오는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모세의 율법에 명확하게 규정되기는 했으나 십일조는 율법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였다.

십일조 폐지론자들도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에서 십일조가 택한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기준이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브람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든, 토지의 소산이든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그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리는 것으로 구별했다.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생활했던 레위인들조차도 그들이 받는 것의 십일조를 또 다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6).

십일조는 무엇이든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었으므로, 토지의 소산인 곡식, 포도주, 기름, 꿀, 소나 양 같은 가축 등 다양했다(신 14:23, 대하 31:5).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약해질 때는 이러한 십일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해 선지자로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말 3:8).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었을 뿐 아니라, 하늘 축복이 임하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폐기론자들은 십일조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돼야 할 율법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 11:13).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끝났으므로 율법의 핵심인 십일조도 구약시대로 폐기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도, 신학도 잘 모르는 잘못된 주장이다. 우리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고 말씀하신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마 5:18). 오히려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에게 보다 철저하고 심오한 ‘완성된 율법’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9~20).

물론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도리어 완성시킨다.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과 같은 의식법, 십계명 같은 도덕법, 복잡한 생활의 문제들을 규정하고 있는 민법이나 형법 같은 시민법 등으로 구성돼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율법들은 온전히 완성된다. 물론 우리는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다시 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법이 폐기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것을 단번에 영원히 완성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속죄를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제사의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또한 율법 중 민법이나 형법의 내용들은 그 문자적인 순종이 아니라, 오늘날 달라진 시대와 문화 속에서 그 율법의 온전한 정신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으로서 더욱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동시에 신약 성도는 예를 들면, 십계명의 정신을 구약의 율법 규정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는 사람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다. 율법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기된 율법이 아니라 도리어 더 온전히 지켜야 할 신앙의 기본이다.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기서 나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십일조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의 마땅한 고백이다.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은 그 기준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 매달 드리는 효도의 양을 누가 법적으로 정할 수 있겠는가? ‘십분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요, 정신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물질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인데, 이것이 빠진 십일조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질문에서 벗어나 ‘어떻게 드릴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2. 십일조, 어떻게 드릴 것인가?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라는 고백에서 출발한다. 내가 수고해 얻은 물질이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십일조를 가능케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빠지는 착각이 무엇인가?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룬 것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도, 기술도, 기회도, 건강도, 아니 우리의 몸과 생명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가! 십일조뿐 아니라 모든 헌금생활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1) 십일조와 헌금 생활의 마음가짐은 자원함으로 드리는 감사와 기쁨이다.

다윗의 때에 성전건축을 위한 백성들의 헌신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대상 29:9).

다윗은 백성들의 헌신을 보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3~14).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더 많이 드릴수록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겸손히 낮아지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2) 십일조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주일 성수도, 십일조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믿음 없이 하는 모든 것은 외식이요, 껍질이요, 율법주의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은 십일조와 감사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쓰고 남은 것으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리고 나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3) 거룩한 농부의 마음으로 심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헌금생활의 중요한 원리를 깨우쳐 준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모든 헌금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일 뿐 아니라 주실 은혜와 축복의 씨를 심는 행위이다. 특히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걸고 강력하게 약속하시는 복된 삶의 비결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그러나 십일조를 도깨비 방망이로 착각하지는 말라. 오늘 심어 내일 당장 거두기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도둑의 심보가 아니겠는가? 농부의 꿈과 인내를 갖고 꾸준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축복을 받기 위해 애쓸지라도,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삶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시키시는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더 큰 축복이다.

십일조는 신약시대에는 폐기된 율법도 아니요, 우리를 부담감과 정죄에 빠지게 하는 함정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과 감사가 자라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주신 축복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율법이기 이전에 ‘하나의’ 표준이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수준까지 내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만약 아직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오십분의 일이든 이십분의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준에서부터 마음을 정해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하면서 온전한 십분의 일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내 믿음도 자라가게 된다. 더 큰 믿음과 감사로 ‘십분의 일’을 넘어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우리 삶의 더 큰 십일조라는 사실이다.

곽수관 목사 / 인천 선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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