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의 소식, 부활의 복음, 부활의 신앙, 부활의 소망 그리고 부활의 능력~ 이것은 기독교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신비요 은총이다.

나는 구약 성경에서는 욥기 19:25~24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의 이 부활 신앙을 가장 감동적인 고백으로 꼽고 싶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15:19~22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바울 사도가 고백하는 이 부활 신앙을 가장 아름다운 고백으로 꼽는다. 지금 산과 들에는 봄꽃들이 지천을 이루고 있다. 아니 애써 산과 들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도시의 도로변이나 하천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만개하고 있다. 벚꽃은 소나무나 그 외 사철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들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자연세계에서 부활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가 부활을 입증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흙속에 묻혀 있다가 시간이 자나면 성큼 성큼 자라나 마침내 그 종자가 아닌 완전한 형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부활과 다름이 없다. 종자(씨앗, 알맹이) 그 자체만을 들여다보면 완성될 그 형체를 도무지 상상 할 수 없다. 그 단순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씨앗이 장차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며 그리고 마침내는 알차고 싱싱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성경은 이것이야 말로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자이다. 스스로 계시므로 영원히 지금 항상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본질적으로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죽음에 묶여 계시지 않는다. 세상(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인간의 죽음을 맛보신 것 일 뿐 끝없이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을 명령하시고 죽음을 장사 지내신다. 예수님은 땅위에 계시는 동안 이 권세를 실제적으로 몸소 보여 주셨다. 그것도 성경에 기록되어진 것만도 세 차례이다. 가버나움(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마을)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었다. 귀엽고 예쁜 딸이 죽었으니 비록 회당장 가정이었으나 그 충격과 슬픔은 컸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소녀의 주검을 향하여 명령하신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일어났다. 살아났다. 사망에서 깨어나 부활하였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음(사망)을 명령하신다. 죽음을 정복하신다.

이번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 행렬이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 장면을 목격하셨다. 과부 어머니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예수님의 마음이 매우 아프셨다. 예수께서 그 상여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향해 말씀 하신다. “청년아 일어나라 !” 그러자 청년이 일어났다. 살아났다. 죽음을 벗어나 부활 하였다. 그 과부 어머니가 말 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세 번째로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이야기다.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또래로서 병을 앓다가 죽었다. 평소에도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친구로 대해 주시면서 가끔 교제하는 사이였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부음 소식을 듣고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그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나 돼 썩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으셨다. 그리고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자가 손과 발이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의 부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활 시켜 주신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신비한 위로이다.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부활 신앙은 매일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 때문에도 좌절하지 말고 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대처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능력이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이 능력을 넉넉히 보장해 준다. 당신이 부활을 믿고 있다면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일희일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대처하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어 하신다.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