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 Context’ Series ॥ (68)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의 문제는 자칫 ‘조건부 용서’ 같은 오해가 들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 용서받음이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함에 달린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 중 예수님 같은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용서하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빈도수에 있어서도 우리는 같은 사람을 세 번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마 18:22)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용서의 질이 예수님의 용서처럼 그렇게 크지도 완전하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색한 용서뿐 아니라 늘 마음 한쪽 구석에 원망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면’ 과연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원리라면 아마도 우리는 아주 조금만 용서받고 말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묵상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용서받음이 이웃 용서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 대속하심(죄값을 대신 치르심)을 믿는 믿음 가운데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고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의롭다 인정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오직 은혜로 억만 죄악을 용서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어 용서를 얻은 자가 당연히 그 은혜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이 액수는 요즘으로 치면 거의 수백 억 정도의 규모입니다.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자 주인이 긍휼히 여겨서 그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주인 앞에서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100일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므로 요즘으로 환산하면 500~1,000만원 정도의 액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친구가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이 용서받은 종의 악함을 보고 그를 불러서 일만 달란트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줄로 알라고 엄벌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1만년쯤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빚인 것 같습니다. 결국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엄중하게 다루시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4-15절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큰 은혜를 받고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용서함에 아주 인색하면 그에게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에게 큰 은혜 받고 죄용서 받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이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용서를 생각하고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이 주님의 은혜가 원인이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것도 이것이 기준입니다. 이웃의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면 더 좋겠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용서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께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빚을 주님께 도로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죄를 지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내가 주님의 생명의 값을 주님께 도로 갚을 수도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흉내를 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빛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독하게도 용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무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가볍게 보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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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연 목사(ebedyeshu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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