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종교개혁과 성상소동

▲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지리적으로 독일과 가까운 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가장 민감했단다. 수많은 루터의 책들이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로 수입되었어. 종교개혁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 하지만 네덜란드에 개신교회가 시작될 수는 없었어. 한편 루터가 죽고 칼빈의 종교개혁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단다.


침내 네덜란드에도 칼빈주의 교회가 처음 생겼는데, 1555년 남부 안트베르펀(Antwerpen)에 칼빈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자들이 최초로 교회를 세웠단다. 그 교회의 이름이 ‘십자가 아래 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onder het Kruis)였어. ‘핍박 가운데 있는 지하교회’라는 의미란다. 당시는 공개적으로 교회로 모일 수가 없었지. 핍박이 아주 심했으니까 말이야. 이웃 도시인 브라반트(Brabant), 브레이다(Breda)에도 그런 지하교회가 생겼어.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은 독일 지역(1517년)에 비해 2세대, 잉글랜드(1534년)에 비해 1세대 정도 늦다고 볼 수 있지. 루터는 1546년에 죽고 칼빈이 제네바에서 열심히 종교개혁을 진행하고 있던 때였지. 칼빈의 영향은 처음 프랑스 개신교 목사들의 책을 통해 네덜란드로 유입되었단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배운 네덜란드 출신 유학생들을 통해서였지. 유명한 몇 사람을 언급해볼까? 제네바 시편 찬송을 네덜란드 말로 번역해 출판한 페이터루스 다테누스(P. Dathaenus), 네덜란드 신앙고백을 작성한 귀도 더 브레(G. de Bres), 얀 타팽(I. Taffin)과 피에르 브룰리(P. Brully)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선구자들이지. 이렇게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제네바 교회의 영향 아래 성장하고 있었어.


당시 네덜란드 지배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립 2세는 네덜란드 지역에 개신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단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랐던 아버지 칼 5세와는 달랐지. 스페인에서만 살았기에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했단다. 필립 2세는 로마교회에 맹종하는 추종자였고 개신교회를 아주 맹렬히 핍박했지.


한편 로마교회는 1545-1565년 트렌트에서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를 열었단다. 그 회의에서 로마교회는 반(反)종교개혁(Contra-Reformation)을 내세우며 기존 교리를 고수하고 개신교회를 저지할 것을 결정했어. 그 결정은 유럽 개신교회에게는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핍박을 의미했단다.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직격탄을 맞았지. 핍박이 너무나 심해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은 외국으로 피신해야 했지.


잉글랜드 런던으로 도망한 네덜란드 성도들이 모여 망명교회를 만들었어. 에드워드 6세가 통치(1537-1553)하던 시기였기에 개신교회를 포용했지. 미크론(M. Micron, 1522-1559) 목사가 담임하다가 나중에는 ‘벨기에 신앙고백’을 만든 귀도 더 브레(Guido de Bres, 1522-1567) 목사가 설교했단다. 1553년 메리 여왕(the bloody Mary)이 통치하면서 다시 개신교회를 박해하자, 또 다른 나라로 피난을 가야했지. 귀도 더 브레 목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해 살았는데 그곳에서 네덜란드 망명교회의 목사로 섬겼어. 그 후 다시 고향 도르닉(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돌아와 그 유명한 ‘벨기에 신앙고백’(1561)을 만든단다. 그는 필립 2세에게 신앙고백을 보내지만, 실패하고 붙잡혀 순교하지.


1566년은 네덜란드 종교개혁에 큰 전화점이 되는 해란다. 그해 네덜란드 전국에 발생한 ‘성상소동’(beeldenstorm)이 그것이야. 1522년 비텐베르크, 1523년 취리히, 1530년 코펜하겐, 1534년 뮌스터, 1537년 아우구스부르크, 1559년 스코틀랜드에도 개신교인들이 로마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일들이 있었어. 1566년 네덜란드 남부 지역에서 8월 10일 시작된 일명 ‘성상소동’이 3주 동안 남부에서 북부로 전국적 규모로 진행되었단다. ‘성상소동’이란 교회내의 성상들과 실내장식들을 훼손하는 사건이야. ‘성상소동’은 필립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단다. 물론 일부 폭력적인 행동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성상들을 조심스럽게 제거했단다. 종교개혁은 성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어. 네덜란드 개신교인들이 교회의 성상과 인테리어를 제거한 것은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페인의 억압과 불의한 핍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어. 네덜란드 개신교인은 구습을 타파하고 종교와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바랐어. 네덜란드 인본주의자와 개신교인들은 스페인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뭉쳐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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