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경 목사
일원동교회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기본이다. 동서양 모두 윤리와 도덕 그리고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자유와 책임이 사람을 동물과 구분하는 핵심 특징이라고 보았다. 유엔 인권선언 첫 조항도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하지만 자유는 마음이 느끼는 것으로서 직관과 경험으로만 알 수 있기에 학문의 옷을 입은 거대한 세계관의 공격에는 언제나 취약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바꿀 수 없다는 운명론과 만물이 획일적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정론이 그런 세계관이다. 근대에 보편 인과론이 확립되면서 자유가 결정론에 먹힐 뻔도 했으나 몸과 마음의 신비로운 관계 덕분에 자유는 수백 년 이상 나름의 위치를 지켜 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 들어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자유의 존재 가능성이 자연과학, 첨단기술, 현대사상 등 여러 분야의 도전을 한꺼번에 받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진화 생물학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별성보다 연속성을 강조한다.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면 동물도 어느 정도는 자유가 있을 것이므로 자유에 바탕을 둔 인간 존엄성 역시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전락하고 만다. 최근 등장한 챗지피티는 기계가 인간 특유의 창의성을 흉내 낼 뿐 아니라 자유마저 모방하는 단계까지 왔다. 조작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의 활동을 자유라 부른다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아 온 자유 역시 무작위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인간의 자아는 외부 환경 요소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극단적 주장을 통해 영속적 자아 곧 자유와 책임의 주체인 자아를 제거하려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뇌과학(신경과학)이다. 정신은 물질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적 전제를 가진 이 학문은 인간의 뇌와 신경 체계를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설명하려 한다. 최근에는 뇌에서 의지적 활동이 있기 직전 준비전위가 먼저 발생하여 의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혔다.

한 마디로 지금껏 자유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본인이 느끼지 못한 인과법칙의 산물이더라는 주장이다. 몸과 마음의 신비로운 관계마저 다 밝혀질 것 같은 분위기다. 이런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손잡고 인간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자연과학과 첨단기술 그리고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이 함께 거대한 세계관을 이루어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강도를 더해가는 이 집요한 공격으로 인간은 전통적 존엄성을 잃고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동물적, 기계적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자유가 없다는 주장은 인류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삶 전체가 자유와 책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윤리체계에 근거해 있지 않은가. 철학계에서는 이미 자유가 없는 인간에게 어떤 질서와 체계가 가능할지 논의하고 있다.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세상보다 급한 건 교회다. 자유가 없다면 기독교 복음 전체가 뜻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다면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죄가 없다면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과 죽은 뒤 있게 될 심판도 허구가 되고 죄인을 구원하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도 동화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성이 전제하는 기본 원리로서 이를 부인하려는 주장이나 노력은 어떤 것이든 복음을 향한 공격이 된다.

교회는 자연과학, 첨단기술, 현대사상이 힘을 합쳐 가해 오는 이런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아, 대책은 둘째치고 그런 공격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도 아직 없다. 이런 세계관의 공격은 당연히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진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의 바탕에 기초적 원리로 깔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좌우한다.

불신 세계뿐 아니라 교회 내부 특히 스마트폰을 끼고 자란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무차별적인 세계관 공격이 지난 수십 년 진행되어 왔다. 하늘과 땅이 뒤섞이면서 우리는 성경적 진리에서 자꾸만 멀어진다. 거룩함을 잃은 채 세속적 물질과 권력과 쾌락과 명예를 더욱 탐하는 교회의 현재 모습이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사실 자유는 어려운 개념이다. 상식과 경험을 넘어 학문적 탐구에 들어서면 정의를 내리는 일부터 쉽지 않다. 우선 자유 자신이 모순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제한의 자유는 불가능하므로 자신과 반대인 제약을 저 안에 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또 자유에 대해 다양한 정의가 있으며 상호 대립적인 개념마저 공존하고 있다. 자유 아닌가!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거대한 정치적 차이를 가져온다. 성경의 가르침도 복합적이다. 죄의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겠지만 자유 없이는 심판대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고 때론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자유이므로 하나만 덥석 물면 오류에 빠진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가 있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조화와 일치다.

교회에서 이따금 자유가 거론된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면 대개 이념적 성향을 담은 치우친 주장이다. 전체를 못 보면서 확신의 주먹을 쥔다. 내부 분열로 이어지면 복음을 향한 마귀의 공격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대응은 꿈도 못 꾼다. 교회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십자가 복음을 허무는 사상은 성도들의 마음과 전체 교회를 점점 잠식해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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