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초원교회 원로, 부산외국어대학 초빙교수)

반고소 경기노회는 1976년에 이미 분리된 경남법통노회와의 연합으로 그 힘을 배가시켜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따라서 송사 문제에 연관하여 생성된 경남법통노회의 분립 과정과 고신 교단과의 합동까지 약 7년여의 존립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본 글의 전개에 있어 필요하다.
경남노회가 송상석을 중심으로 소송을 반대하자 한상동 측의 총회는 경남정화노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신총회는 경남정화노회 총대를 회원으로 받음으로 기존의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분리되어 별도의 노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남노회는 송상석을 따르는 경남법통노회 측과 고신총회와 고신대학 교수회의 주장을 따르는 경남정화노회 측으로 양분되었다. 


기존의 경남노회에서 분리된 소위 경남정화노회는 1974년 조직되었다. 1974년 제24회 총회에서는 재판회가 모여 경남법통노회의 총회 재판회 지시 불복 건에 대해 판결했다. 1975년 고신 교단 제25회 총회는 마침내 소위 경남정화노회를 정통 노회로 인준하고, 송상석 중심이던 경남법통노회를 배제함으로 법통노회 총대들은 총회 회원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은 총대 노회로 소집하여 총회에 행정 보류할 것을 결의하고 1975년 9월 26일에 결의문을 선언했다. 
경남법통노회의 분리는 총회 측에서 바라던 결과였다. 그러나 곧이어 경기노회가 분리되고 이들과 경남법통노회가 연합함으로 고신교단은 예기하지 못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경남법통노회는 반고소 명분이 절실한 가운데 이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반고소 경기노회 측과 제휴를 모색하였다. 고신총회 측은 경남노회에 총회 전권위원을 파송하여 1975년 10월 마산 동광교회당에서, 소위 경남정화노회를 경남노회를 계승하는 노회라는 점에서 ‘경남계승노회’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였다. 총회에 대하여 행정 보류를 한 경남법통노회는 1975년 10월 제일문창교회당에서 제103회 정기노회를 소집했다. 이때 경남법통노회는 경동노회가 교단 내에서 반고소 투쟁을 전개할 의사임을 확인했다. 


경남법통노회는 경기노회에서 하찬권을 제명하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경기노회에서 제기된 반고소 주장이 위기에 봉착한 송상석과 그를 따르는 경남법통노회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남법통노회는 경기노회 내에서 자신들의 계열로 분류되는 최영구, 박성호 등이 하찬권에게 합류하도록 했고, 석원태까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자, 경기노회 반고소 측의 연구 보고를 받고 동 연구위원회에 감사와 격려장을 보내기로 가결하였다.
경남법통노회 측에서는 경기노회의 하찬권이 반고소를 주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찬권이 치리 당할 때 경남법통노회 측 인사들이 하찬권과 행동을 함께하지 못했다. 송상석과 함께 중징계를 받았던 정판술도 처음에는 당시 경기노회의 상황을 경남법통노회에서는 잘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경남법통노회와 경기노회(반고소)와의 연합은 반고소 정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남법통노회는 하찬권을 배제하고 석원태 측과 제휴하여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송상석은 총회에서 단절되자 이전과 달리 반고소의 선봉에 서서 총회와 차별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경남법통노회는 교단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으며, 총회의 불법 처사에 대한 공개 항변과 행정 보류의 이유와 경위를 성명하기로 가결했다. 1976년 4월 제104회 정기 노회에서 경남법통노회는 반고소 경기노회와 함께 반고소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송상석 측과 석원태 측은 반고소를 명분으로 연합했으나, 외적 명분이 약했다. 석원태는 당시 반고소 운동에 미온적이다가 합류했고, 송상석은 이미 불신 법정 송사를 감행한 전력이 있는 인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석원태와 송상석은 하찬권을 배제한 상태에서 서로 간 약점을 보완하여 자신들이 반고소주의자로 인정받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석원태는 비록 송상석이 고소 전력이 있다 할지라도 당시는 반고소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명분과 세력을 취했다. 반면, 송상석은 자신의 약한 반고소 기반을 하찬권으로 충족시키려다 실패하자, 석원태를 반고소주의자로 내세워 그와 연합하는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그 후 석원태가 반고소를 명분으로 하여 교단을 일시 성장시켰다고 하여 그것을 순수한 반고소 교단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석원태 측과 일시 제휴했다가 결별한 경남법통노회 측은 송상석 사후 고신 교단과 조건 없이 합동했는데, 합동 과정에서 고소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에서 어떤 논란과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고소 문제가 분열의 실제적인 이유가 아니었음을 양측이 자인하는 결과였다. 결국 경남법통노회 측을 신학적으로 순수한 반고소주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말하자면 경남법통노회와 경기노회의 제휴는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교단 내에서 반고소를 고수했던 경동노회는 교단 분열을 반대하고 내부적으로 투쟁했기에 경기노회와 경남법통노회의 연합에 가세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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