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금주금연?

▲문장환 목사
▲문장환 목사
오랫동안 한국교회에서 술과 담배는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알려졌고, 일반사회에서도 기독교인을 바라볼 때에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이 가진 독특한 전통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술과 담배는 금기와 허용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보다는 기독교인의 실제적인 삶에서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지만 밖에 나가면 적당히 마시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어떤 교단이나 교회에서는 술과 담배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 기독교인들은 음주와 흡연의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잘 지키지도 않으면서 족쇄만 채워놓은 듯한 전통을 교회가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음주흡연은 비신자가 기독교로 개종을 할 때에도 문제가 된다. 일반인은 기독교는 술과 담배를 해서는 안 되는 종교로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오라고 하면 술과 담배를 끊고 나서 오겠다는 대답을 듣곤 한다. 그러면 금주금연의 전통이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지금까지 금주금연이 기독교의 전통으로만 알던 교인들이 외국 교회들을 경험하고 난 뒤에는 혼란스러워한다. 필자가 다닌 남아공의 한 장로교에서는 예배가 아닌 모임에서는 교인들이 포도주를 즐겨 마셨고, 네덜란드에서는 우리에게 건물을 빌려준 화란개혁교단(31조파, 고신의 자매교단)의 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치자마자 교인들이 예배당 건물에 둘러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렇다면 금주금연은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보기 힘든데,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기독교=금주금연’ 과연 맞는 공식이며, 지켜야 할 전통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금주금연 전통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겨보고,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금주금연 전통이 만들어진 정신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도 시기적으로 필요하다.

1. 한국교회의 금주금연 전통

기독교가 전래될 때부터 음주와 흡연을 정죄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초기선교사들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는 특이한 나무걸이가 있었는데, 장죽(長竹)걸이였다. 담배를 피우다가 교회에 오면 장죽을 걸어놓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사경회 중 휴식시간에는 막걸리나 막초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이 볼 때, 한국인의 음주흡연 습관은 너무 심해서 많은 문제점들의 온상이었다.

기포드 선교사의 기록에 보면, 조선에서는 술에 취하는 것이 널리 유행했는데, 술을 마시고는 길거리에서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은 흔하다고 했다. 유순하고 예의가 바른 조선인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악을 행하게 하는 원인이 술이라고 했다. 알렌 선교사는 조선 남자들의 인생에서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술을 실컷 마실 수 있는 돈을 버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에 아편이 성행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대신에 조선의 흡연의 폐해는 컸다고 했다. 중국에 아편이 성행하듯이 조선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퍼져있는 흡연습관으로 건강과 위생, 경제적인 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카펜터 선교사가 보기에 조선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게으른 흡연가였다. 담배를 빨아들인 뒤에도 대를 입에서 떼지 않고 그저 입을 열어 연기를 내뱉으면서 담뱃대는 그대로 아랫니에 남아 있게 하는 모습은 정말 바보스럽고 게으르게 보였다.

이런 형편에서 선교사들은 음주와 흡연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금지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초기 선교사들이 금욕과 절제의 삶을 강조하고 춤과 카드놀이와 담배를 탐닉하는 것을 죄로 여기는 청교도 신앙의 소지자였기에 조선의 음주흡연은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였고, 이를 변화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이에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과 도박의 금지, 축첩 금지와 함께 금주금연을 신자의 표징으로 제시하고 세례 받을 때에 이것들을 확인했다.

이후 선교사들 및 교계 지도자들은 교회와 신자의 삶에서 금주금연의 논리를 펴갈 때 다음의 이유들을 강조했다. 첫째, 음주흡연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인 몸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때때로 이 주장은 영혼 구원의 문제와 직결해서 술을 먹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이며, 술을 먹다가 죽으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겠는가를 의문했다. 둘째, 음주흡연은 개인적으로는 빈궁의 원인이 되고, 민족적으로는 개화를 크게 방해하는 것들로 주장했다. 역으로 금연금주는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오고 민족의 문명 부강의 기초로 여겼다. 셋째, 음주흡연은 신체와 정신에 해독을 줘서 질병과 죄악을 낳고, 유전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자녀를 얻게 해서 결국 조선 사회에 폐를 끼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이런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금주금연을 결행했다. 축첩, 점술, 흡연, 음주 등의 악습을 그만 둔 것은 선교사들의 강요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시행했다. 초기 교회당회록, 회보, 교계신문, 그리고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금주와 금연은 기독교인이 되는 첫걸음으로 여기고 세례문답 등을 통해서 확인했으며, 술장사 등은 금했다.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됐다고 하더라도 음주흡연 문제가 발생하면 치리했다. 치리한 죄목으로는 하나님께 범죄 한 일, 교회법을 어긴 일, 가족에게 광언지설(狂言之設)한 일, 자기 몸을 망하게 한 일이었다. 그리고 술장사, 심지어 누룩장사를 한 것에 대해 치리하고 결의했다.

1920년대부터 기독교의 금주금연은 국채보상운동과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져서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1923년에 창립되면서 금주금연운동을 펼쳤고, 장로교나 감리교도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당초 교회의 순결과 신자의 성결의 증거로서 강조된 금주금연이 기독교인들에게 내면화되고 난 뒤에는 한국사회를 정화하고 개조하는 방편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기독교인이라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식됐다.

2. 성경에서 음주와 흡연

성경은 독한 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잠언 23장 29~31절에 보면, 혼합주(지금의 폭탄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저지르게 되는 어리석은 악들을 나열하면서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노아가 실수한 원인과 롯이 딸들과 근친상간하게 된 연유가 술과 연관돼 있다고 보도한다. 신약에서 술에 취함은 폭행, 방탕, 음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윤리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심각한 죄다. 하지만 놀랍게도 술을 긍정적으로도 언급하는데, 시편 104편 15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의 하나로 말하고, 신명기 7장 12~1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받는 복 중에 하나가 새 술의 풍성함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주를 만드셨고 또 마셨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병에 대해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했다. 포도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음식문화에서 일반적인 음료로서 사용됐고,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삶의 기쁨 중에 하나로 취급한다. 자연스럽게 교회는 성찬식 때 빵을 사용한 것처럼 포도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엄격하게 금했다.

그렇다면 술에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는 것은 허용할 수 있는가? 또한 담배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없으니까 흡연은 가능한 것이 아닌가? 결국 흡연과 적당한 음주는 아디아포라(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그 답은 해당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아디아포라의 범위를 구원의 문제로 둔다면 해당되지만, 도덕적 선악의 문제로 둔다면 해당되지 않는다. 윤리적 문제에서는 선악이 적용된다. 이것은 지금 사회에서 음주흡연의 실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3. 한국사회에서 음주와 흡연

대한민국은 알코올 공화국이다. 이렇게 쉽게 술을 구할 수 있는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식당에서 아무데서나 누구나 값싸게 구할 수 있다. 술 선전을 이렇게 많이 하는 나라도, 이렇게 대낮부터 밤새도록 마시는 나라도, 술로 인한 실수나 범죄에 이렇게 관대한 나라도, 주사(酒邪)한 것을 이렇게 대놓고 자랑하는 나라도, 술로 사고가 나고 병이 나고 죽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없다. 우리 국민 중 2백만 명이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로, 7백만 명이 알코올 남용자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소한 1천만 명 이상의 그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음주운전으로 매년 1천 명이 죽고, 5만 명이 부상을 당한다. 살인범의 경우 64%정도가 술 취한 상태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술은 패가망신의 대명사인데도, 이 사회는 끝없이 술을 권한다.

담배는 실수와 범죄의 원인은 되지 않지만, 건강을 심하게 손상시키고 가족과 사회에 상당한 손해를 끼친다. 담배 잎을 말아서 만든 것이 담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 인체에 온갖 해를 끼치는 화학물질 덩어리다. 자극하고 중독하기 위해 인, 카드뮴, 암모니아 등 나쁜 건 다 넣어서 사람으로 빠져나오지를 못하게 만든다. 담배연기에는 4천여 종의 화학물질들이 기체나 입체 형태로 섞여있다. 전 세계의 흡연자는 11억 명인데, 인간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흡연이다. 간접흡연 또한 심각해서 미국 보건청에서는 간접흡연은 일급살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흡연 폐해가 당장 나타나지 않으니까 서로 독약을 권하는 게 우리 사회다. 이런 상황이라면 기독교의 금주금연 전통이 지금도 가치 있고, 더 나아가 그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4. 오늘날도 기독교=금주금연?

‘기독교=금주금연’은 맞는 공식이며 지켜야 할 전통인가? 대답은 이렇다. 틀린 공식이지만 지켜야 할 전통이다. 틀린 공식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과 금주금연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를 한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술과 담배를 하는 문화의 신자들은 다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술과 담배를 하는 외국 신자들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직 주초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우리나라 신자들을 지나치게 정죄해서도 안 된다. 신앙생활이 초보거나 신앙이 연약한 사람인 경우에 더 주의해서 비본질적인 문제로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주초문제로 신앙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비신자에게는 기독교의 본질이 금주금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설명해줘야 한다.

그래도 기독교=금주금연은 지켜야할 전통이다. 몇 가지 원리에서 그렇다. 첫째, 성경 원리에서 독한 술이나 많은 양의 술로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자기의 몸을 치명적으로 상하게 하는 행위로써 흡연을 금하고 있다. 둘째, 술과 담배를 기호품으로 여기고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보더라도 건덕의 원리에서 지켜야 한다. ‘기독교=금주금연’으로 인식하는 교회와 사회에서 음주흡연문제가 불거진다면 사회의 지탄을 받고 다른 교인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음식물로도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호품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셋째, 전도의 원리에서 봐도 그렇다. 어떤 불신자가 술과 담배를 하는 신자의 권면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너나 똑바로 하라’고 할 것이다.

지금 이 전통을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킬 것인가?

교회는 종종 주초문제에 관해 역사와 성경적 원리, 실태와 상황, 그리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이 문제로 교회에 악영향을 끼친 일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책망과 치리가 뒤따라야 한다. 아직 주초를 하고 있는 교인이라면 자기가 대범한 사람인 것처럼, 다른 이들은 믿음이나 의식이 연약한 사람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해일 뿐만 아니라 교만이다. 그리고 끊을 수 없다고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금주금연을 할 때 20%는 성공을 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몇 번 다시 시도해 결국 성공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이 전통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만다. 한국교회의 금주금연은 개인과 교회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고 사회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다. 신앙 문제에서 끝내지 않았고, 건강과 위생, 경제, 그리고 의식의 운동으로 확대돼, 사회와 민족과 나라를 갱신하는 도구가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금주운동이다. 최근 금연운동은 법적으로까지 뒷받침이 되고 있지만, 음주는 여전히 관대하다 못해 권장한다. 특히 방송을 보라. 음주 폐해의 통계발표가 나오면 잠시뿐이고, 드라마에서도, 오락프로에서도 온통 술을 먹는 이야기뿐이다. 조사에 따르면 드라마 한편 당 한번 이상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고, 오락에서는 대놓고 주사를 영웅담처럼 이야기하고, 어린 소녀들이 나와서 술을 선전한다. 정말 뻔뻔스러운 얼굴들이고 방송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나 시민단체가 이들에게 항의하고 사회적으로 금주운동을 하는 것이 사회와 민족의 갱신을 책임져온 기독교의 전통이 그 가치를 실현하는 길임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금주금연 이라는 전통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세우는 것도 한국교회에 좋은 일이다.

문장환 목사 / 진주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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