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우리의 역사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한 자가 영화를 누릴까? 어떻게 참학(慘虐)과 광포(狂暴)가 줄을 잇고, 무죄한 자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왜침이 곡절(曲折)되고,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가는가? 이런 질문은 새삼스럽지 않다. 주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이 하나님의 침묵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일본 두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치하에서 천주교인들이 고통을 당할 때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절규도 동일했다. “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사를 간섭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에는 거짓과 불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루터는 인간사의 불의가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다. 그 숨은 뜻을 루터는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루터는 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지금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모든 역사 현실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했다.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제의 식민지배나 8.15 광복이나 6.25 동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다를 수 있지만 숨은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창세기 5020절의 요셉의 고백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를 애굽으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4-8)고 하여 인가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증거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대하36:22, 1:1).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역사 저편에서 뒷짐 지고 계시지 않고, 인간의 역사 한복판에서 오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체인 것처럼 말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역사의 주관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31:14)고 고백했다. 이 고백에 근거하여 보헤미아의 존 후스는 비록 불의한 교회권력에 의해 무죄한 이단으로 화형대에 서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31편을 묵상하며 화형대에 올랐다.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역사의 질곡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 곧 영원회귀적인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었다. 또 모든 역사과정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 이런 역사에 대한 인식을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불렀다. 말씀을 통해서(per verbum) 무에서(ex nihilo)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지탱하시며(conservatio), 모든 것과 동행하시며(concursus), 모든 것들이 그가 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하도록 다스리신다(gubernatio).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하나님이 설정하신 분명한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적이란 말은 역사 사건에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분명한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사를 단안(單眼)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 낙담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때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점을 마틴 부버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긴 안목(長眼)으로 역사를 성찰 하는 원근법적 안목이다. 지금은 우리가 다 해명할 수 없지만 역사 사건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우리는 비관적인 현실에서도 낙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비관론적인 낙관론자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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