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기간입니다. 교회마다 성탄절 행사 준비에 분주합니다. 목사는 설교준비 압박이 큽니다. 성탄절 설교는 해마다 같은 주제를 조금씩 달리 해야 합니다. 예배와 행사가 많아서 여러 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 설교는 다른 절기 때보다 어렵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주로 예수님이 오신 의미와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설교를 해왔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는 설교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다가 예수님이 중심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웃 사랑은 일 년 사시절 강조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올해는 그 흐름을 조금 바꾸어볼까 합니다. 설교 본문은 이미 예수님 탄생 중심으로 정해놓았지만 내용은 이웃 사랑 쪽으로 조금 나가보려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살벌함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강대강의 대치가 끝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싸움이 가족 안에서도 일어나고 세대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정치가 사라졌습니다. 상대방의 완전굴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로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서로 배척하고 서로 심판합니다.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릅니다.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긴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살기 싫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우린 분명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교회도 무풍지대가 아닙니다. 목사의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 교회가 반쪽 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설교 듣다가 일어서서 나가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정치적인 설교까지도 정치적으로 해석합니다. 말 한 마디조차 조심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사상과 당파와 정치가 신앙에 우선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크리스천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어떤 행동을 했다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력해진 느낌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도리어 복을 빌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교회에서는 이 말씀들에 아멘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전혀 실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실 텐데 말입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였습니다. 벨기에의 이프르(Ypres) 지역에서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성탄절 이브가 되었습니다. 독일군 쪽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영국군이 노래를 듣고 박수 치며 환호했습니다. 노래를 끝마친 후 독일군 장교가 나와 영국군 하사와 악수를 합니다. 독일군과 영국군은 성탄절 휴전을 맺었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캐롤송을 불러주었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교환했습니다. 담배, , 소시지, 초콜릿, 술 등을 선물로 주고받았습니다. 서로의 참호를 방문해서 카드놀이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이 성탄절의 휴전은 군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휴전이 되었습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당시 서부전선에는 이런 비공식 휴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참전국 대부분이 기독교 문화권에 속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런던 소총 여단의 오스왈드 틸리 병장은 이때의 일에 대해 자기 부모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두 분이 거위 고기를 드시는 동안, 저는 몇 시간 전까지 죽이려고 애썼던 바로 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손도 흔들어 주었답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말할 만한 휴전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할 휴전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도 성탄절 휴전을 시도해야 합니다. 총부리를 서로 겨누던 병사들도 해냈던 일을 우리라고 못해낼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캐롤을 부르면 누구라도 화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화해의 악수를 청하면 누구라도 손을 마주 낼 겁니다. 한 번만 성공하면 두 번 성공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두 번 성공하면 역사에 남습니다. 그런 역사가 기록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발전합니다. 이번 성탄절, 우리나라 곳곳에서 휴전이 선포되고, 캐롤이 흘러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험한 사회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어보아야겠습니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지금 사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이를 위한 최적의 기회입니다. 던지기는 쉽지만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으로 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촛불을 드실까? 태극기를 드실까? 아니면 평화를 위해 노력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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