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하고 직접 대면해서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식사 때에도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면벽 식사를 할 만큼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다 보니 온 국민이 자가 격리 상태이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예배를 모이는 곳에는 행정조치로 구상권을 청구한다.”라고 하는 말까지 나오니 우려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 아니다.


언론들이 가난한 교회들은 임대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홈페이지 개설, 방송 장비 설치 등의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열악한 재정 상황 때문에 헌금을 받을 수 있는 현장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고 보도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 교회의 영광을 훼손하고 예배의 거룩함을 훼파하는 처사이다.


지하철, 클럽, 노래방, 콜센터, 유흥업소 등은 가만히 두고 예배를 강력하게 저지하고 예배 강행 시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집회 제한 명령을 어긴 경우에는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하는 등의 논리는 교회의 본질을 오도하고 신앙생활의 기본을 왜곡하는 처사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사실상 온 인류가 자택 대기 상태이다. 그야말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TV를 보는 것도 지치고 아이들의 게임만 늘어난다. 생활 리듬이 깨지고 단조로우면서도 무료하니 코로나 공황, 코로나 우울증이 올 지경이다. 국내 의료기관들이 도입한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는 편의성과 안정성 때문에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이 같은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승차 구매)가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뿐 아니라 대면접촉을 꺼리는 각종 상거래로 확산하고 있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음식을 즐기는 식당이 생기고 도서, 장난감을 안전하게 빌려주기도 한다. 이동금지, 외출금지령이 내려진 나라도 있다.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이렇게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이러한 바이러스가 계절병처럼 유행하고 주기적으로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우한 폐렴처럼 등장할 수 있으니 지혜롭게 대비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기는 불안하고 집에 머물기는 답답하다. 남과 나를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지만 간단하지가 않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친밀한 거리(45.7cm 미만), 개인적 거리(45.7~1.2m), 사회적 거리(1.2~3.7m), 공적인 거리(3.7m 초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심리적인 거리는 타인의 침입과 간섭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공격성과 파괴적인 욕구가 밖으로 튀어 나가 상대방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한 거리이다. 정서적으로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거리가 있다.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담이 있어야 한다. 외부로부터 오염, 감염, 전염되는 것을 방어하는 울타리가 되고 내부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한 방어막이 담이다. 그래서 내외간에도 구별이 있어야 한다. 부부는 심리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행복한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길이다. 부부 사이는 너무 멀리 있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이 있어도 안 된다.


영적인 거리확보가 중요


교육계도 개학이 5주나 미뤄지는 초유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전례 없는 조치들이 뇌관이 되어 그간 잠복해 있던 학생과 학부모, 교사, 교육 공무직, 교육 당국 등 교육계 구성원 내 불신과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다. 평상시에는 수면 아래 있던 관계가 극도의 위기 상황이 닥치자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코로나19보다 드러나는 갈등을 어떻게 수습할지가 더 큰 숙제이다.


사회적인 거리 유지보다 영적인 거리확보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 하였다. 사탄은 분리의 영이지만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다.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어야 한다. 떨어지면 말라 죽는다. 성경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다. 신앙생활은 기도의 자리를 확보하고 기도의 대상을 확대하고 기도의 응답을 확신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이웃과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사회적인 거리 두기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정진하는 성도의 최소한의 발걸음을 강압적으로 제지하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지도자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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