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약신 목사와 자녀들


이약신 목사는 1952년 9월 11일 진주성남교회당에서 발원한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 총로회 초대 총회장이시다. 자녀로는 1남(성웅) 5녀(효주, 효재, 효숙, 성숙, 은화)가 있다. 차녀 고 이효재 교수는 한국여성인권 운동가이며, 前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고 이효재 교수는 2020년 10월 4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이보민 박사는 고 이효재 교수와 사촌지간이다.


고 이효재 교수는 2006년「아버지 이약신 목사」편을 출간했다. 출간 후 책을 들고 총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를 찾아, 저서를 소개하기도 했다. 총회 앞에서 그는“제가 고려파 교회의 초대총회장이셨던 이약신 목사님의 차녀 이효재 입니다. 이번에 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사회학자 고 이효재의 유학생활, 인권 운동


고 이효재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했다. 모교(이대 영문과 출신)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0년에는 반체제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해직되기도 하였다.


1990년 교직을 은퇴하였으며, 1997년부터는 경남진해로 낙향하여(1945년 마산에서 경신복지회를 설립했으나, 이후 진해로 옮김) 아버지 이약신 목사가 설립한 경신사회복지 재단에서 지역사회 봉사에 전념했었다. 한편 5공화국 시절인 1996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나‘무원칙 선정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고 이효재 교수의 저서는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2006년에 발간된 253 페이지 분량의 저서「아버지 이약신 목사」편은 이약신 목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저서로 평가된다. 이약신 목사가 6개월 동안 호주여행을 다녀오신 후 초량교회를 사임하였으며, 이후에 평양의 신광교회에서 1939년 7월부터 2년여 간 단독 목회를 하셨다. 특이한 것은 「한국 인명백과대사전」에 송상석 목사 본인이 생전에 임종직전 이덕주 교수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송상석 목사(일대기) 편에는 신광교회에서 이약신 목사와‘동사목회’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이약신 목사의 차녀 고 이효재 교수가 집필한 저서에는‘평양 신광교회’사역내용에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약신 목사는 일본 유학과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춘 잠재적 역량을 갖춘 분이시다.


이약신 목사는 1898년 4월 25일 평북 정주군 오산면 익성동에서 출생하셨다. 1915년 3월 오산중학교를 졸업하셨는데, 주기철 목사와는 동기생으로 같이 졸업했다. 1915년 주기철 목사가 있는 경남 웅천으로 내려와 웅천읍 개통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6년에는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를 역임했다.1917년 마산에서 이상소의 차녀 이옥경과 19세에 혼인을 했다. 혼인 후 일본 동경 중앙대학교 상과를 2년(1918~1920) 수학한 후에 귀국하였으나, 상과 공부에 갈등을 다시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에 전념하다가 양산읍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1926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했다.


처가는 당대 최고 부유한 명문 집안, 좋은 가정으로 장가를 가셨다.


이약신 목사의 부인 이옥경의 아버지 이상소(이약신 목사 장인, 이효재의 외할아버지)는 대구사람이었으나, 20대 청년으로 마산포에 내려와서, 상업 활동으로 큰 부를 쌓았다. 큰 부로 인해 각 지방에 한명씩만 두는 종5품의 지방관직 인‘도사 직’을 얻기도 했다. ‘이도사’는 대지주가 되어 한때는 3천500석을 하였다고 한다.


의사인 사위 이순필은 학산병원을 신축하였으며, 일제말기까지 병원을 운영했다. 오병세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사위 이순필과 이약신 목사는 진해지역 적산 땅 처리 관련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진해 해군하사관학교에서 박윤선 박사의 진해강좌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 장소는 강주선 목사가 공간을 잠시 빌려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다.

경남도경 감방에 수감된 신사참배 반대자들


1941년 9월 손명복 전도사는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조사를 받은 후 경남도청(당시는 부산이 경상남도이며, 도청이 부산에 소재함) 경찰국으로 이감되었다. 이약신 목사는 도경 제5감방에 있었다.(자료 : 심군식 저「손명복 목사의 생애」1997년)



감방 별로 수감된 주의 종들

제1 감방에는 최덕지, 송봉덕, 박인순, 배학수 등이
제2 감방에는 최달성, 강루석 등
제3 감방에는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보복희, 강성희, 김야모 등
제4 감방에는 김수영
제5 감방에는 이약신
제6 감방에는 손명복

이미 1941년 7월 한상동 목사, 최상림 목사, 주남선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은 검거되어 도경에서 심문을 받은 후에,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후 도경은 이약신 목사의 생명이 위태롭다고‘속히 데리고 가라’고 사위 이봉에게 전달한 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이약신 목사는 만주 봉천의 이모 댁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가 1942년경이다. 이때부터 이약신 목사 가족은 일경으로부터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때로는 순사들에게 불려 다녔고 심적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1954년 박윤선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미국 방문 초청을 받고 동행한 분으로는 박윤선, 이약신, 한상동, 박손혁 목사가 함께 했다. 1954년 7월 31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있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상동 목사는 페이스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았다.


이약신 목사는 진주 옥봉교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은 후 2년간 사역하셨으며, 초량교회에서 8년간 사역하셨고, 평양 신광교회에서 2년간 사역하셨다. 이후에는 마산문창교회에서 1년간, 진해교회에서 3년간, 진해남부교회를 설립 하여 7년간 사역하셨다.


이약신 목사는 1949년 경남노회 초대 노회장을 역임하셨으며, 1952년 9월 경남 노회장을 1대 이후 2대, 3대를 연임하셨다. 1952년 9월 1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총로회 초대 총회장을 역임하셨다. 1957년 1월 20일 5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위대한 선진들이 자랑스럽다.



김영수 장로(고신대 前사무처장, 한상동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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