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산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 ‘정수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400여 년 전부터 한 씨들이 씨족사회를 이루며 폐쇄적인 유교 양반문화를 이어오고 있어 복음이 전해지기 참으로 어려운 곳이었다. 이러한 마을에 평촌교회가 설립 된 배경은 필자의 아버지 한영우 성도가 어머니(노정수)의 치료를 위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외숙부 두 분이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순사 칼에 맞아 죽게 되었고, 이를 목격한 어머니는 충격에 땅 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병환이 깊어졌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으나 아무런 효험이나 고칠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3711월경 당시 중리교회 최성봉 조사의 노상 전도를 받고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어머니 병환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평촌교회 설립 멤버 중 한 명인 이재연 성도 역시 개인사(둘째아들 죽음)로 얻은 충격과 질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의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또 중천 댁(성명미상) 역시 아버지의 권유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초기 3명의 성도들은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짓기로 결심하였으나 한 씨 일가친척들의 강력한 반대로 예배당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동네에서 떨어진 평촌기차역 부근 아버지의 밭에 예배당을 지어 19386월경 입당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평촌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집사로, 조사로서 역할을 하며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였다. 당시 중리교회 조사로 봉직하던 최성봉 조사가 가끔씩 평촌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곤 했다. 성도들의 헌신으로 전도의 결실을 맺어 동네에서 여러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조금씩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3년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발하고 거부하자 평촌교회는 폐쇄되어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당시 성도들은 가정예배를 통해 신앙의 열정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일제에 의해 사할린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어 노역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평촌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할린에서 귀국할 당시 귀국선 2척의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데 일제는 강제징용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배에 폭탄을 장착하여 배 한 척(우키시마호-7천여 명 승선)은 폭파되어 침몰하였고, 다른 배에 승선한 아버지는 어렵사리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교회 부흥에 힘쓰며 생업을 위해 용산 철도기술학교를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하고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6년에 철도 공무원 4급 시험에 합격하고 보직을 받았지만 평촌교회를 떠나지 않고 섬겼다.

한번은 큰아들이었던 내가 부산 철도국에 심부름을 갔다가 그곳 직원이 나에게 아버지가 한영우 씨냐?” 묻기에, “라고 하였더니, “!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면서 누가 4급 공무원이 7급 공무원 밑에서 일하는가?”라고 하셨다.

나는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사실을 자초지총 말하였더니, “괜찮다. 평촌교회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양군수보다 월급이 많으면 됐지, 괜찮아.” 하시기에, 철없는 마음에, “아버지, 평촌교회가 아버지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아버지 안 계셔도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 까지 집사로 여기서 계시는 것보다 다른 교회에 가서 봉사하여 장로님도 되세요라며 투정하기도 했다.

그 후 아버지는 진주~삼천포 기차선로와 진주~순천 기차선로 공사에 기술감독관을 갔을 때는 진주중부교회를 잠시 섬겼다가, 유수역 철로반 분소장, 군북역 선로반 분소장을 거쳐 그 공로로 철도청장 표창장 2, 대통령 표창 1회 받았다.

한편,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니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동네 일가친척들이 너도 교회 가라, 누구는 교회 다니더니 공부를 1등 한다고 하며 자연스럽게 전도가 되었고, 내 동생들 모두 진주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장학생으로 졸업하여 아들 4명 중에 목회자가 3명이 배출되었다. 한 번은, 내가 함안읍교회에서 목사 위임식을 하였는데 평촌교회 설립과 신앙생활에 대해 그렇게 반대하던 백부님을 위시하여 5촌 당숙부님까지 와서 축하하며 함안 읍내 어르신들에게 우리 조카가 목사라고 자랑하는 소리 듣고 당시 나는 눈물이 나도록 감사했다.

지금은 78세로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평촌에서 올라 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일가 60여 가정이 한 번씩 모이면 옛날과는 정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목사라고 존경을 받는다. 앞서 간 선진들의 신앙의 토대와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해 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와 영적 부흥과 회복도 한국교회 초대 신앙인들의 자세와 열정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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