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핀니언 칼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2017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올 한 해 모두가 종교개혁을 외쳐 대었다. 목사와 신학자가 제일 많이 읊어 대었을 것이고. 청년들도, 교인들도 종교개혁을 주워 섬겼을 것이다. 그 모든 이들이 종교개혁을 어떤 의미로 말했을지 의문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뚜렷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니 실망할 수밖에 없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하도 떠들어 대니까 사회에서도 흥미를 가지고 주목해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500주년을 맞는 당일에 벌어진 어떤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부자세습이 한국교회의 민낯이라는 것을 쓸쓸하게 확인시켜 주기도 했고 말이다.

종교개혁은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미덕은 소극적인 것일 수 있는데,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 것이다. 종교개혁은 중세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신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 중세교회는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두려움을 계속적으로 부추겼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어넣어 주어야 교회체제를 유지할 수 있고 교회에 돈이 모이니까 말이다. 요즘에는 종교든지, 국가든지, 기업이든지 상관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부추겨서 자신들의 활로로 삼고 있지 않은가? 종교개혁은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 주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노동자, 즉 겁 없이 일하는 사람을 탄생시켰다. 종교개혁이 인류사회에 너무나 큰 진전과 복을 안겨다 주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발견하다

중세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고상(苦狀)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매일 기도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극심한 고생을 해야 겨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재발견했다. 종교개혁의 후손들은 내 존재가 그리스도께 달렸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나의 존재와 나의 일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믿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나를 속속들이 결정하신다는 믿음 말이다. 개혁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다 내가 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내 것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서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내가 한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자들의 후손들이 믿어야 할 것이다. 죽도록 일해도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일하지 않아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 것 말이다. 이제 우리는 겁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됐다.

은혜로 일하는 사람이 탄생하다

종교개혁은 은혜를 재발견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상이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상이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라면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게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을 주장했을 때 로마교회가 하던 조롱이었다. 오직 믿음은 선행을 제거하는가? 아니다. 선행을 하지 않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 신자는 성공이 아니라 감사의 열매를 맺는다. 신자는 선행은 감사이다. 나도 신자이기에 힘껏 감사함으로 행한다. 다윗의 고백처럼 신자의 마음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신자의 눈을 남을 깔고 보지 않고,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자는 마음이 좁쌀 같아서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자는 죄 짓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시도한다.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한다. 신자는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주님 대하듯이 한다. 이게 바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겁 없이 일하는 사람을 탄생시켰다. 은혜로, 감사로 일하는 사람을 탄생시켰다.

함께 일하는 기쁨을 발견하다

종교개혁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해 잘 가르쳐 주었다. 개혁은 로마교회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개혁자들은 구원을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이 구원, 그리고 행위와 관련하여 늘 복수로 말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자의 구원은, 신자의 행위는 단독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공동체적이다. 신자는 다른 사람과 연대감이 강하다. 자신이 순전히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그 공로는 자격 없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자신을 본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읽었기 때문에 사람을 제대로 읽는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신자는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신자는 다른 신자를 통해서 자신을 본다. 신자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 교회가 그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라는 것을 안다. 그는 교회 속에서 말씀을 받으면서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이 할 일을 발견하고 사회에 나가서 행한다.

개혁하면 우리는 제도를 개혁하는 것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종교개혁은 사람개혁이다. 딴지를 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목표가 개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개혁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다. 개혁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에 무엇이든지 한다. 신자는 죄짓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 종교개혁은 공로를 쌓아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끝없이 불안한 가운데 일하는 것을 극복했다. 종교개혁은 불안가운데 공로를 쌓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감사함으로 일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었다. 종교개혁이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 그리고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출현시켰다.

오늘날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겁 없이, 담대하게 하지만 겸손히 함께 일하는 사람 말이다. 어느 누구의 종도 아니지만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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