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훈 고신대 교수 논문, 미국 학술지 웨스트민스터 신학저널 등재

개혁파 신학자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은 중세신학자 스코투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기존 주장에 반대하며 개혁파 자유의지론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 전통을 참조하고 자체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저널에 고신대 신학과의 우병훈 교수의 논문이 등재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발간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저널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저널 중에 하나로서, 1938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2회 발간되고 있다. 저널의 편집진과 심사자들은 미국의 개혁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인 베른 포이스레스, 랜달 페더슨, 칼 트루만, 그레고리 빌 등으로 이번 우병훈 교수 논문 등재는 아시아 신학자로는 이례적이다.

우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최근 네덜란드에서 안톤 보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개혁파 자유의지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다루고 있다. 보스와 그와 함께 활동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개혁파 자유의지론은 중세 신학자 스코투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지만 우 교수는 튜레틴과 스코투스의 자유의지론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두 신학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근거하여 작업했기 때문이지 튜레틴이 스코투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의지론

자유의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고대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수사학자인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결정론의 입장을 가진 철학자로 분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이 다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후 3세기 초반에 활동한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결정론자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자들 사이에서도 역시 이 주제는 해결되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다.

우병훈 교수도 역시 이 문제를 다루는데,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다룬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스코투스와 튜레틴이 그들의 자유의지론 논의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명제론9권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의지론은 논리적 측면에서의 자유의지론과 형이상학적 자유의지론과 윤리학적 자유의지론을 모두 아우르는 논이다.

반면, 니코마코스 윤리학3권과 6권에 나타난 자유의지론은 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의지론을 다룬다. 니코마코스 윤리학3권과 6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성향들이라는 것은 자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성향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중요한 주장을 하는데, 미래 사건뿐 아니라 현재 사건 역시도 우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현재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에 과거의 사건은 심지어 신들도 바꿀 수 없는 사건이기에 우연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런 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결정욕구적 지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지성적 욕구라고 부르기도 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39b4-5).

- 스코투스의 자유의지론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작품은 약 1200년경쯤에는 라틴어로 다 번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철학자라고 불리면서 중세 학자들에 의해 널리 인용되었다. 스코투스도 역시 자신의 강의에서 결정론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스코투스는 존재하는 사물에는 우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특정 지식이 사물의 우연성과 양립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필연적 존재자이신 하나님은 우연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비록 이 지식이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필연적으로 시간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장차 있을 사건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에 의해서 사물들의 자유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코투스는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9권을 인용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서 결정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던 결과물의 필연성결과의 필연성의 구분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한다.

또한 스코투스는 종합적 의미에서의 이해와 분할된 의미에서의 이해를 구분한다. ‘종합적 의미에서의 이해란 같은 시점과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분할된 의미에서의 이해란 다른 시점과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람은 달릴 수 있다는 말은 종합적 의미’(같은 시점)에서는 틀린 말이다. 앉아 있는 사람이 동시에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분할된 의미’(다른 시점)에서는 참이다. 앉아 있는 사람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일어서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와 미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지식은 종합적 의미’(같은 관점)로 보자면 양립할 수 없다. 하지만 분할된 의미’(다른 관점)에서는 그것이 참이다. 왜냐하면 미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지식은 시간에 종속되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커, 베크, 플레이지어 등은 스코투스가 여기에서 공시적 우연성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라고 한다. ‘공시적 우연성이란 같은 시간에서 우연성이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이다. 스코투스가 공시적 우연성을 제시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스코투스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19a23-29)에서 벌써 공시적 우연성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의 새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개념을 새로운 주제 즉,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자유라는 주제에 접목시킨 데 있다.

-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튜레틴은 변증 신학 강요라는 작품의 제 10주제에서 자유의지론을 다룬다. 그는 인간의 자유선택 능력이 죄 아래에서 속박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자유선택이란 지성에 속해 있거나 의지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자유선택이 지성과 의지 모두에 동시에자리 잡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한다.

튜레틴은 인간의 자유선택 능력을 인정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필연성이 있지만 인간의 자유선택 능력은 그 필연성에 구속 받지 않을 수 있다. 자유선택이란 무차별성에 근거하지 않고 지성의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차별성이란 의지가 선택을 할 때의 중립성을 뜻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타락했다는 점에 있다. 타락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택할 능력이 없다. 타락 이후에 인간은 의지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선을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다. 타락한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때에 무차별성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의지란 타락 전이든 타락 이후이든 무차별성 속에 있지 않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튜레틴은 자유선택의 주체는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의지에 속해 있지만, “선택이라는 측면에서는 지성에 속해 있다고 한다. 지성의 선택은 의지에서 종착점을 맞이하고, 의지의 자유는 지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답하지 않고 열어놓은 것도 이러한 이중적 특성 때문이라고 튜레틴은 주장한다. 튜레틴은 지성과 의지 사이에 어떤 실제적은 구분은 없다고 한다. 다만 대상과 관련하여 외적인 구분이 있을 뿐이다. 동일한 기관이 지식과 관련될 때에는 지성이라 불리고, ·불호와 관련될 때에는 의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튜레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3권과 6권을 가지고 성격이 안 좋은 인간도 역시 수동적으로 자신들의 성향을 수납할 뿐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윤리적 성향은 자발적이며 우리들의 능력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튜레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라서 인간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할 때에 그것은 무차별성의 자유에 근거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간은 이성의 자발성에 근거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이나 악을 택할 때에는 이미 앞서는 숙고하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튜레틴은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서 튜레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양한 논리적 구분들을 사용한다. 이처럼 튜레틴이 자유의지론을 구성할 때에 스코투스를 의존했다는 데커, 베크, 플레이지어 등의 주장은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공시적 우연성개념은 튜레틴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여 증명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만일 튜레틴이 스코투스를 의존했다면 분명 스코투스를 인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에서는 스코투스를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튜레틴이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스코투스가 인용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공시적 우연성개념은 영국 학자 폴 헬름(Paul Helm)이 주장하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역시 사용한 개념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중세 이후부터는 여러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시적 우연성개념을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그런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전통이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자유의지론에 있어서 스코투스와 튜레틴의 차이

데커, 베크, 플레이지어 등을 비롯한 안톤 보스 그룹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스코투스의 자유의지론과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을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첫째, 두 사람의 계기가 다르다. 스코투스의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때 제시되었다. 반면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은 타락한 인간이 과연 어떤 자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전개되었다. 둘째, 무차별성에 대한 두 사람의 이해가 다르다. 스코투스는 타락한 인간에게도 역시 무차별성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타락한 인간도 역시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로마 가톨릭식의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생각이다. 반면에 튜레틴은 인간에게는 타락 이전이든 이후든 무차별성의 자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의지는 타락 후에는 죄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스스로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없다. 튜레틴은 스코투스와는 달리 전형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우병훈 교수는,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이 스코투스에 근거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튜레틴과 스코투스의 자유의지론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론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차별성의 자유에 대한 견해나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튜레틴의 견해는 스코투스와 너무 크게 차이가 난다.” 즉 튜레틴의 자유의지론을 스코투스주의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두 사람의 자유의지론과 자료 사용과 구원론을 면밀하게 비교·검토하지 않은 데서 생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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