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 함께하신 하나님 15-1

사람들의 내면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육체의 아픔, 마음의 상처 등으로 고통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왕이 되어 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만과 이기심은 고통과 질병, 죽음이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고통과 슬픔, 죽음의 근원인 죄를 그분에게 지우심으로 단번에 죗값을 치르시고 동시에 영원히 죄와 죽음을 멸하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계기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마주했던 때였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2002년 4월 5일 식목일은 부모님을 따라 인도에 도착한 날이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에 갓 올라온 나는 외국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이었고 국내에서도 이사가 잦았었기에 한국과의 이별의 아쉬움은 없었다.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먼 외국 땅에 살면서 “정말 고생 많았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형식적인 인사인지 정말 힘들었을 아이를 위로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의아해하며 생각하곤 했다. 진짜 고생은 부모님이 하시는데 왜 내가 이런 인사를 듣는 것일까? 선교지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이었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접하며 배울 기회였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비교적 쉽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문화와 언어도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혔고 힘든 일이 있어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위로해주는 부모님이 계셨기에 괜찮았다. 그렇게 현지 학교에 다니며 현지 언어를 배웠고 얼마 지나서 기숙사학교에 입학해서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생활하는 것에 적응해갔다.

부모님은 기차로 2박 3일, 거기에 버스로 15시간을 더 가야 하는 머나먼 북인도의 산골짜기에서 사역하셨고 우리는 서로를 방학이 되어야 만 만날 수 있었기에 온 가족이 함께하는 짧은 시간은 더 소중한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현지 학교에서 4학년을 반복하고 6학년으로 올라가자마자 머나먼 남인도의 기숙사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는 6, 7학년을 건너뛰어 8학년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렇게 13학년까지 마치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사이에 기쁘고 감사한 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았지만, 이 글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이후의 일에 집중적으로 나누고자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대학을 가고 싶었다. 오랫동안 떠나와 있던 한국이 낯설었고 가끔 올 때마다 달라졌던 모습에 겁이 났다. 하지만 해외로 가는 것은 재정적으로 부담되어서 한국에서 글로벌하고 수업도 영어로 진행되기로 알려진 한 대학교에 지원했다. 합격이 쉽지 않다고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입학면접과 시험을 보았고 망쳤다는 생각에 앞길을 고민하던 차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곳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학기는 오리엔테이션 기간부터 쉽지 않았다. 한국 특유의 수련회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첫 주간은 시작부터 나의 혼을 쏙 빼놓았고 그렇게 시작된 나의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어두웠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 자체가 아직은 매우 낯설었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주위 환경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지 나름 혼란스러웠고 그 혼돈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힘들었다. 모든 것이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빠르게 돌아갔고 그 속에서 나는 홀로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생활패턴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부터 이미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단순히 학업을 떠나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들,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곳이 나를 지치고 피곤하게 했다. 혼란스러워진 나의 몸과 마음은 이미 그곳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것 같았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그때의 내가 한국의 분주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열린 마음을 가졌었더라면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힘들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날의 나는 한국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때의 나의 몸과 마음은 한국의 문화를 거부했고 인도와 비교하면 할수록 이곳에 대한 환멸감은 커졌다. 나의 몸과 마음은 이 모든 스트레스, 화, 슬픔, 긴장을 받아들이느라 힘들었었나 보다.

학기를 마치기 전 몸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 발가락 한 곳에 고통이 느껴졌다. 병원에서의 검사 후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고통이 발가락 한 군데가 아닌 발과 다리, 하체 전체, 그리고 결국 팔과 다리, 온몸 전체에 전이되면서 고통의 강도 또한 매우 심해졌다. 극심한 아픔에 걸을 수조차 없어진 그때 병원을 다시 찾아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물치료와 주사치료를 통해 아픔을 줄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완전한 치유는 없는,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병이라고 했다. 소개로 찾아간 류머티즘 계열의 유명한 전문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며 완치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와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앞으로 나의 건강이, 나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몸은 아프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간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전능자를 찾는 것이었다.

<계속>

글 | 김다솔 MK(인도, 김두평·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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