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기술로 자비량 선교하는 원주민 사랑

▲전대원 선교사(경남남부노회 파송·배우자 김남주 선교사) 부부
▲전대원 선교사(경남남부노회 파송·배우자 김남주 선교사) 부부

텐트메이커(장막만드는 일)를 업으로 삼고 자비량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를 했던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과 업이 같은 아굴라 부부를 만나 함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위한 협력을 했다. 바울이 3차례에 걸친 순회 선교사역을 하고 로마까지 여행을 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직업이 기반이 되었다.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초대교회로부터 헌금을 받으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믿고 감사로 받았지만, 바울은 교회에게 먼저 헌금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일하여 번 돈으로 나누는 자비량 선교사의 모델이었다.

전대원 선교사(경남남부노회 파송·배우자 김남주 선교사)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을 많이 닮아 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전도서 322)” 즐거워하며 일하는 것처럼 축복이 없다. 전대원 선교사는 일을 즐거워하고 땀 냄새가 향수처럼 풍기지는 달란트가 많은 인물이다.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타고난 재능

초여름 경남 함양 수동면 그의 고향집 그늘이 있는 평상위에서 전 선교사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손재주가 많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다. 농사일을 하셨던 부친 슬하에서 자라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것을 자연스러웠다. 그의 재능은 공고를 진학하면서 업그레이드됐다. 활동적이었던 그의 적성에도 맞았다. 당시에는 일반 인문계 고교보다 공고나 상고 등 실업계가 고교 입시 점수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공고를 다니면서 자동차 수리, 배관, 판금, 금형 설계 등 다양한 기술을 익힌 것이 훗날 자비량 선교사의 기반이 됐다.

재주가 많았던 탓일까? 많은 경험을 하다가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했고, 군대에서 군종사병으로 활동하며 내부반에서 취침기도를 인도하기도 했다. 기도에는 복음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외로 교회 다니는 사병들이 많아지자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대대장이 영내에 교회를 짓고자 병사들 중에 지원자를 찾았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원해 4개월 만에 1호 부대 교회를 지었다.

목회를 하면서도 이웃교회를 돕는 일은 다반사였다. 수리나 간단한 건축은 식은 죽 먹듯 해냈다. 자신의 달란트를 통해 이웃에게 유익이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교통사고로 입은 다리 장애

대구 초목교회 전도사로 시무할 때,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유학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안전교육을 받으러 가던 도중 사고가 발생해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하나님이 목회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가?’부터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인근에 있는 삼천리기도원이었다. 이곳에서 원목으로 섬기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이후 사고는 당했지만 장애가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생활하면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거창 전원교회, 고성 동해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며 재미있게 목회를 했다. 그렇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만 20년이 지날 때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계속 국내에서 목회를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사역을 향해 도전해 볼 것인가?’ 그의 선택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보다 새로운 선교 사역지를 향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자비량 선교로 일궈나가는 선교현장

당시 경남남부노회 파송으로 필리핀 사역현장에 파송된 그는 이규식 선교사 밑에서 2년간 언어적응훈련과 선교를 배워나갔다. 그렇게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태국 호이안 방라뭉 촌부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처음 이방인을 맞이하는 원주민들은 냉소적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이 일당을 주고 일을 하자고 해도 무시하거나 시쿤둥한 반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4~5개월이 지난 후 기술자와 함께 일할 수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사역이 훨씬 편해졌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14명에게 장학금도 주고, 쌀통을 세워 매일 1kg의 봉지를 놓아두고, 지역민을 위한 상수도 개발로 깨끗한 물을 공급하다보니 이 지역에서는 그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감이 생겼다. 현재 원주민 사역자인 폰사완 목사 가정과 전도사 가정, 사찰 집사를 세울 정도로 성장했다.

이 같은 사역을 하려면 재원이 가장 큰 문제인데, 낙천적인 그는 한 번도 걱정하지 않는다. 3개월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비량 선교의 재원이 되는 노동을 한다. 그렇게 마련된 재원은 또 다시 선교현장에서 쓰여 진다. 단순한 후원으로 이뤄진 선교가 아니라 직접 땀 흘린 대가로 벌어들인 물질을 원주민 사역에 쓰고 있다. 한번 귀국할 때마다 3개월간 체류하면서 교회 사택, 축사, 원두막 등의 공사를 한다. 재료는 직접 주인이 사오거나 결재하도록 하고 자신은 인건비만 청구해 저렴하게 공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보니 일감이 꾸준히 이어진다.

한국에 올 때마다 베이스캠프로 쓰여 지는 고향집을 바라보는 그는 이 곳에 작은 음악회도 하고 선교사 안식관 용도로 쓰일 선교센터를 꿈꾸고 있다. 그가 틈나는 대로 현대식 건물로 일부 개조해 놓은 고향집은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을 돌아가며 비전트립 숙소로 제공되기도 한다.

선교의 꿈을 함께 꾸는 가족들

아버지를 닮았는지 가족들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의 꿈을 함께 꾸는 동역자가 됐다. 큰 딸 전상은 필리핀 세부 선교사, 둘째 딸 전지혜 태국 파타야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막내 전정수 군은 태국 방콕 에이백 대에 재학 중인데 역시 선교의 비전을 두고 준비 중에 있다.

전정수 선교사의 사역 현장에는 함께 신앙의 비전을 나누는 50여명의 성도들이 꾸준히 출석하고 있다. 이 성도들과 함께 건물 면적 4,132.23143층 건물을 짓고 있다. 현재 뼈대가 만들어져 부분적인 벽돌쌓기와 미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1층은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교로 지원한 지 7년 만에 이룬 열매들이 이제 선교현지에서 자녀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다양한 악기교육으로 지역민들을 섬기는 그의 바람은 이 건물이 완공되면 본국에서 은퇴한 분들이나 사역에 재충전이 필요한 분들이 이 곳에 와서 쉬기도 하고 가진 달란트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휴식 겸해서 이 곳에 오면 원룸형 게스트룸을 제공하게 된다. 건물이 완성되면 3층에 체육관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현재 고신대 태권도선교학과도 두 번 다녀간 상황이라 구체적인 사역방향이 정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현지인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위해 대구에서 신학공부를 시키고 있다. 이렇게 차세대 지도자를 세우고 현지인들 중심의 사역이 이뤄지도록 운영할 계획이다. 그의 비전이 현지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너리즘과 장애를 극복하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흘리는 땀 방울의 소중함을 직접 보여주는 전대원 선교사의 사역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과 닮아있다. 결산의 날 수고에 대한 하늘의 보상은 상상이상 기대이상이리라.

Jun Dae-Won

65/21.M6. Huaiyaijin Huaiyai Banglamung Chonburi Thailand 20150.

Tel. 092 379 939

▲막내 전정수 군과 함께한 김남주 선교사
▲막내 전정수 군과 함께한 김남주 선교사

▲자비량 선교의 힘이 되고 있는 집짓기 기술로 지어진 멋진 사택.
▲자비량 선교의 힘이 되고 있는 집짓기 기술로 지어진 멋진 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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