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준아, 믿었던 친구가 너를 실망시킨 적 있니? 그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너를 속인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속인 경우 말이야. 게다가 너를 속인 것이 점점 더 심해지고 악랄해지다가 네가 알게 된 경우 있어? 아니면 반대로 네가 너를 믿는 친구를 의도적으로 속인 경우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해서는 안 되는 경험이라 없길 바라고 앞으로도 그런 일 없기를 바라) 한 번 상상해봐. 너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긴 시간동안 너를 의도적으로 속이고 있었다면 네 마음이 어떻겠니? 비록 너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친구가 너에게 하는 언행을 예전처럼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겠니?


자신을 예전처럼 신뢰해주지 않는 너를 대하는 친구와, 가장 믿었던 친구의 말을 예전처럼 신뢰하지 못하는 너 중에 누가 더 힘들까? 믿고 싶은 친구인데, 믿어야하는 친구인데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 쪽이 더 힘든 게 아닐까? 잘못한 친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대가이고,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너를 속였으면 너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는 뜻이고, 그런 거라면 네가 그 친구를 신뢰하던 하지 않던 그 친구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머니가 너를 양육할 때도 동일해.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까 실수할 수 있어도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머니를 속인다면 너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어야 할 어머니인데도 너의 언행에 신뢰가 가지 않게 되고, 내 자녀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 슬픔과 절망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니까. 상상해본 적 있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의 언행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믿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의 슬픔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 되거든.


예전에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했었어. ‘나 한 사람 없다고 하나님이 무슨 그리 큰 손해를 보실까! 나 없다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뭐 그리 아쉬울까,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신데.’ 나 없다고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고, 중단되지 않잖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마음에는 그리움이라는 상처는 남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그러다보면 추억이 될 거고.


나 한 사람 없다고 크게 바뀌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나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목숨을 주셨어. 그리고 내가 잘못할 때마다 고치도록 알려주시고 잘못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징계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해주셨어(징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잘못을 해도 징계하지 않지). 너무 이상하지 않니? 나 한 사람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너를 양육하다보니 그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어. 내가 내 자신을 보는 것과 어머니가 자녀를 생각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내 자신은 보잘 것 없고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지만 어머니에게 있어 자녀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준아, 네가 그런 존재라는 것은 어떠한 잘못이든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해. 잘못의 대상이 하나님이든 어머니이든 너를 믿는 친구이든 아니면 불특정 다수이든. 너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바 되었고, 어머니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이고, 너를 믿는 친구에게는 세상을 함께 살아갈 든든한 동반자이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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