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종교개혁이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단다. 이 두 주제는 항상 충돌했어. 교회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거야.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루터와 에라스무스, 칼빈과 피기우스(S. W. Pighius, 1520-1604)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있었지. 성경은 구원이 인간의 믿음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단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하지만,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타락을 믿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항의했단다. 교회 안에서 궁금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거나 토론할 수 있지. 하지만,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이 없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호기심으로 연구하는 것은 위험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분석하면 영생은커녕 멸망에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단다.


종교개혁 이후 인본주의 신앙이 교회에 싹이 트고 있었을 때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르미니우스(J. Arminius, 1559-1609)야. 아르미니우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어머니는 홀로 어린 아이들을 돌봐야했단다. 스페인 군대가 아르미니우스가 살던 아우더바터(Oudewater)를 점령했을 때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았지.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여관에서 종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어. 아르미니우스는 머리가 비상했단다. 그의 능력을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그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 그는 레이던(Leiden)에서 대학을 마치고 당시 개혁신앙의 본산지인 스위스 제네바로 갔단다. 그곳에서 칼빈의 후임자인 베자로부터 개혁신학을 배웠어. 아르미니우스는 머리가 총명했지만, 제네바 아카데미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그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1588년부터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사로 일했어. 그는 목사로서 중생은 인간의 동의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교했단다. 중생은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일방적인 일인데 말이야.


1591년부터 그의 설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단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에는 인본주의적 신학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 1603년 아르미니우스는 명석함 때문에 레이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어. 그는 교수로 임용될 때 개혁신앙 이외의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서약했단다. 하지만 교수가 된 후 아르미니우스의 태도는 돌변했어. 그는 본격적으로 정통 개혁신앙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특히 그의 선생이었던 호마루스(F. Gomarus, 1563-1645)와 논쟁이 시작되었단다. 아르미니우스는 성경에 나오는 예정과 선택을 믿긴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에 대해서는 호마루스에 동의하지 않았어. 그는 호마루스가 하나님을 죄의 책임자로 만든다고 비판했지. 호마루스는 정통 개혁신앙에 따라 ‘믿음은 선택의 결과’라고 가르쳤단다. 아르미니우스는 그를 공격했지. ‘만약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만이 믿음을 갖게 된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것이다.’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다고 주장했어. 아르미니우스는 ‘선택은 믿음의 결과’라고 보았단다. 그는 믿음을 갖기로 선택한 신자를 하나님이 선택하기로 예지했다는 애매한 말을 했어.


아르미니우스의 지지파가 많은 홀란트 노회는 1603년 그에게 이 문제를 연구하도록 맡겼단다. 그는 1604년 ‘예정에 관한 논제들’이라는 논문을 썼지. 그는 그 논문에서 예정에 관한 기존 교리가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폭탄선언을 했어. 이렇게 됨으로 예정교리는 이제 한 개인의 의견을 넘어 교회의 문제가 되고 네덜란드 전체가 휘말리게 된단다. 몇 번의 공개토론이 있은 후 아르미니우스는 1609년 병이 들어 죽고 말았어. 1609년부터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12년간 이어지는 휴전이 시작되었지. 이제 싸움의 대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하게 된단다. 교회 안에 자생한 인본주의자들은 정치세력화 되면서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지.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 개혁신앙 이외에 다른 의견을 표출하지 못했던 믿음 없는 교인(?)이 큰 소리를 치게 된 거란다.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