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국제 관계와 네덜란드 종교개혁

▲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16세기 유럽의 강력한 통치자는 칼 5세(Karl V, 1500-1558)란다. 그는 1500년 네덜란드 지역에서 출생했고 어린 시절 그곳에서 자랐지. 그의 아버지 필립 1세(Philip I the Handsome, 1478-1506)는 네덜란드 지역의 왕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는 독일의 여러 소국들의 왕이며, 외할아버지는 스페인의 왕이 된단다. 칼 5세는 6살이 되던 해(1506)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 네덜란드 땅을 물려받지. 16세가 되던 해(1516),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스페인의 왕이 되어. 19세가 되던 해(1519),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독일 지역의 왕이 된단다. 이렇게 칼 5세는 유럽 대부분의 땅을 다스리는 거대 왕이 되어. 칼 5세는 옛 로마제국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지.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반대하고 심지어 교황까지 반대해. 특히 프랑수아 I세가 황제가 되려 했지. 그래서 둘은 늘 싸울 기세였어. 화가 난 칼 5세는 개신교를 따르는 독일 군대를 부추겨 로마 교황청을 공격하도록 한단다. 위기에 처한 교황이 마침내 칼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어. 칼 5세는 교황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단다. 이렇게 그는 1520년 지금의 아켄(Aachen)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취임해. 그 후 24년 동안 황제로 지내다가 아들 필립 2세(Philip II, 1527-1598 영국의 피의 메리와 결혼)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를 넘겨주지.


‘침묵자 빌럼’(Willem the Silent, 1533-1584)은 ‘오렌지 공작’(Duke Orange)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단다. 일종의 왕이지. 정식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야! ‘오렌지 왕자’ 혹은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프랑스의 오랑주(Orange) 지방의 상속자이기 때문이야. 사촌이 상속자가 없이 죽자 두 지역의 땅을 그에게 상속했어. 조건은 로마교회의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었지. 빌럼의 아버지는 11살 아들의 미래를 위해 그 조건에 서명한단다. 이렇게 빌럼은 브레이다(Breda)와 브뤼셀(Brussel)에서 칼 5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감독 아래 외국어(라틴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군사 교육과 외교관 교육을 받았어. 빌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의 총애를 받고 나중에 22살의 나이(1555년)로 제국 군대의 장군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해. 칼 5세는 빌럼을 좋아해 아끼는 신하로 두었단다. 칼 5세가 기력이 다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아들 필립 2세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발표를 했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부축했던 자가 바로 빌럼이었으니까!


1559년 필립 2세(Philips II, 1527-1598)는 빌럼을 네덜란드의 정식 총독(stadhouder)으로 임명한단다. 빌럼은 어릴 때 경건한 루터교회 부모 밑에서 양육 받고 자랐기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이 종교개혁 신앙으로 핍박 받는 어려움과 고통을 안타까워했어. 필립 2세가 네덜란드의 개신교인을 억압하고 고문하고 핍박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 어느 날 빌럼은 프랑스에 갈 일이 있었단다. 그곳에서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스페인 왕 필립 2세가 얘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어. ‘우리가......프랑스와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개신교인들을 다 죽여 종교개혁 신앙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언어에 능통했던 빌럼은 그 얘기를 다 이해했지만, 못 알아들은 척하며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침묵했다’(silent)고 해. 그래서 그의 별명이 ‘침묵자’(the Silent)란다. 침묵자 빌럼!


네덜란드로 돌아온 빌럼은 자기 백성을 구할 방법을 찾지만, 쉽지 않았어. 1564년 필립 2세의 박해가 심해지자 1565년 네덜란드 ‘귀족연합’이 항의편지를 써 올렸단다. 당시 네덜란드의 총독은 파르마의 마가리트(Margaret of Parma)였지. 귀족들은 항의서에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요구했어. 지배계급 스페인을 향한 일종의 항의였지. 그랬더니, 한 동안 핍박이 중단되었어. 망명 갔던 신자들이 독일과 스위스에서 돌아왔단다. 몰래 지하에서 예배를 드리던 개신교인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숲속이나 넓은 들에서 예배하며 설교를 들을 수 있었어. 이 설교를 ‘숲속 설교’, 혹은 ‘들판설교’(Hagenpreek)라고 불러. 한 번에 5천-7천명이 모이기도 했고 심지어 1만 명, 아니 2만5천명이 모이는 곳도 있었단다. 바른 복음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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