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우리가 부르는 ‘영국’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가 합쳐진 나라란다. 정식 이름이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지. 우리는 16세기 당시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살펴볼 거란다. 그래서 ‘영국’이라는 단어 대신 ‘잉글랜드’라고 할 거야. 잘 기억해두렴!


잉글랜드에도 종교개혁 신앙이 자라고 있었단다. 14세기경 옥스퍼드 대학 교수 위클리프(J. Wycliffe, 1320-1384)가 성경을 자국어(영어)로 번역해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단다. 영어성경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밑거름 역할을 했지. 1517년 대륙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어. 루터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었단다. 경건한 신자들이 루터의 책을 읽고 종교개혁 신앙을 따랐지. 잉글랜드 정부는 개혁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했지만, 진리에 대한 열망과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단다. 하지만 잉글랜드 교회의 체제와 교리, 그리고 삶을 개혁하고 변화시킬 만큼은 아니었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어. 잉글랜드 왕 헨리 7세(Henry VII, 1457–1509)는 외교와 정치적 이유로 장남 아서(Arthur)를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과 결혼시킨단다. 하지만 아서는 결혼 후 6개월 만에 전쟁에서 죽어. 헨리 7세는 1509년 4월 22일 과부가 된 캐서린과 둘째 아들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를 결혼시킨단다. 결혼 후 아버지가 죽자 헨리 8세가 왕위를 이어받는단다. 헨리 8세는 골수 로마 천주교회 신자였어. 만약 형이 죽지 않았다면 로마 천주교회 사제가 되었을 거야. 아마도 켄트배리 대주교가 되었겠지. 그는 루터의 신앙을 아주 싫어했어. 루터의 책을 읽는 사람을 핍박했단다. 그는 루터를 비판하는 책도 직접 썼는데, 교황으로부터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도 받았지.


헨리 8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어. 그것은 자신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거야. 아내 캐서린은 6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죽고 딸 메리(Mary I, 1516-1558)만 생존했단다. 사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어.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았지. 심지어 캐서린과 결혼한 것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단다. 캐서린은 그의 형수였기 때문이지.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 1517-1536)을 사랑했단다.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요청했어. 교황은 그의 요청을 거절했단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였고 황제는 캐서린의 오빠였으니 교황은 황제의 눈치를 봐야했기에 허락할 리 만무했지.


헨리 8세는 로마 천주교회와 교황이 진저리가 났어. 헨리 8세는 4년 동안이나 이 문제로 고민했단다. 하지만 별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어. 그 때 토마스 크랜머(T. Cranmer, 1489-1556)가 나타나 헨리 8세에게 문제를 풀 수 있는 묘안을 주었단다. 토마스 크랜머는 형수와 결혼 한 것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했어. 그러니까 헨리 8세의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한 거야.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의 충고가 너무 고마웠단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1533년 앤과 덜컥 결혼했단다. 로마 천주교회와 관계를 끊을 각오를 한 거야.


1534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는 마침내 로마 바티칸의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발표했어. “종교에 관한 모든 사건들은 이제부터......로마의 교황으로부터가 아니고......왕의 관할과 권위 안에서 최종적으로......논의되고 결정될 것이다.” 이제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통치권자는 교황이 아니라 헨리 8세란다. 만약 이 법을 거부하고 잉글랜드 국왕을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는 대역 죄인으로 처벌한다고 선포했어. 1535년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수장령에 반대한 죄로 처형되었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한 왕의 개인적 사정 때문에 시작되었단다. 헨리 8세는 로마 천주교회의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했단다. 로마 천주교회와 잉글랜드 교회는 그 후 지금까지도 분리된 상태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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