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 구본철 화백
▲ 삽화 = 구본철 화백

독일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앙, 곧 성경 비평학은 미국 교회에서 큰 인기였단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작품이라고 믿기 시작했지. 또 영국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1859년에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한 후 진화론은 미국 교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어.


다른 한편 이런 급진적 변화를 본 일부 개신교 보수주의자는 ‘세상, 말세야, 말세!’라며 혀를 차곤 했단다. 그래서 나이아가라(Niagara)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 예언 사경회’라는 것을 개최해 세계 종말에 관해 연구하고 나이아가라 신조(The 1878 Niagara Creed)를 작성했지. 이런 움직임은 나중에 20세기 초에 나타나게 되는 근본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된단다.


어쨌든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에 자리 잡은 신앙적 자유주의(Liberalism)가 현대주의(Modernism)라는 형태로 자라고 있었어. 이들은 신앙을 현대 문화에 적용해야한다고 믿었지.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 속에 자연법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기적이나 이적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단다. 기적을 믿지 않았어.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단다.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그것을 능히 할 수 있다고 보았지. 동시에 주관적인 경험과 느낌을 강조하면서 정통 교리를 멸시했단다. 윤리가 교리를 대체했고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했지. 이런 자유주의 신앙은 점점 교회를 잠식하고 있었단다.


장로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어. 1922년 5월 21일 뉴욕 제일교회 주일 아침 예배에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ts Win?)라는 설교를 한 목사가 있었단다. 침례교 출신 목사로 헤리 포스딕(Harry E. Fosdick, 1878~1969)이었어. 그는 성령의 영감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대속과 재림 같은 교리에 대해 보수적 입장과 자유적 입장이 있으니, 모두 교회 가운데 포용해야한다는 관용(Tolerance)을 주장했단다. 1923년 필라델피아 노회는 총회에서 그의 신학을 문제 삼았지. 1924년 총회는 그의 설교를 공격했지만, 포스딕이 미리 교회를 사임하는 바람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끝났단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클라렌스 매카트니(Clarence E. N. Macartney, 1879~1957)는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Shall Unbelief Win?)라는 설교를 하며 자유주의에 맞섰어.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존 메이첸(John. G. Machen, 1881~1937)도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책을 써 자유주의에 대항했지. 목사는 본래 임직 받을 때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따르고 설교하겠다고 약속한단다. 그 서약을 어기고 자유주의 신학을 교회에서 가르친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야. 목사가 교회의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면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버텼단다.


포스딕 사건 이후 장로교회 안에 있던 자유주의 목사들은 가만있지 않았어. 1923년 12월 26일 뉴욕 어번(Auburn)에 150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모여 총회에 항의하는 선언문을 만들었단다. 1924년 1월 선언문을 전국 교회에 뿌렸어. 그 내용은 더 이상 정통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었지. 같은 해 5월, 무려 1,293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그 선언문에 동의하며 서명했어. ‘어번 선언문’(Auburn Declaration)이지. ‘어번 선언문’은 교회가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부활’, ‘기적’, ‘성경의 권위’와 같은 주요 신앙은 인정하지만,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인정해야한다고 말했단다. 북 장로교회 안에 수많은 다양한 교리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된 것이지.


북 장로교회는 이 움직임에 대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 신앙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단다. 교회는 그런 목사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 이것은 실수였어.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목사들을 처벌하지 않음으로 그런 생각을 교회 내에 허락한 격이 되고 말았지. 1920년대 후반에는 자유주의 목사들이 교단내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단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을 교회에서 내쫓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어. 이 선언은 현대주의의 노골적인 공격으로 여겨져 신학적 상대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라고 불리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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