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 구본철 화백
▲ 삽화 : 구본철 화백

미국 근본주의의 출현은 부흥운동과 연관이 있단다. 회중교회 신자였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단순한 성경에 호소하는 강연으로 대규모 부흥운동을 일으켰지. 남북전쟁 직전에 고향인 뉴잉글랜드에서 시카고로 이주해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에 참여해 활동했어. 그는 주일학교에 열심히 봉사하고 기독교 문서를 만들어 나누어주는 일을 했으며, 기독교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을 도왔단다.


1873년에 찬양 인도자인 친구 생키(Ira Sankey, 1840~1908)와 영국으로 일종의 전도여행(1873~1875)을 떠나 경험한 2년 동안의 성공적 집회가 그의 삶을 전도자(Evangelist)로 바꾸어 놓았어. 당대의 유명한 스코틀랜드 자유 장로교회 목사 앤드류 보나르(Adrew A. Bonar, 1810~1892)와 런던 침례교회 목사 찰스 스펄전(C. Spurgeon, 1834~1892)의 지지와 도움을 받았단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집회에 그랜트 대통령과 각료들이 참석하기도 했어(1876). 전국을 순회했단다.


그의 집회 강연은 조용하고 솔직하고 하나님과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방식이었지. 과장된 행동도 하지 않았단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을 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교리 같은 것을 설명하지 않았단다. 그는 아주 단순한 복음의 핵심에만 집중했지. 그는 죄로 인한 인간의 파멸(Ruin by Sin)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Redemption in Christ)과 성령님으로 인한 중생(Regeneration by Holy Ghost)을 강조했지. 이것을 ‘Three R’이라고 불러. 무디는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이 세계를 난파된 배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선을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무디야,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건져내어라.’” 그는 설교 가운데 예화를 많이 들었는데 특별히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단다. “어떤 주일 오후에 아이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식이 뛰어노는 동안에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이 깨 아이를 찾았으나 아기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이와 같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남녀 기독교인이 지금 자녀가 무시무시한 절벽에서 까마득히 깊은 구덩이를 향해 곧 내어딛으려 하는 이때에 자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여! 당신의 자녀는 오늘밤 어디에 있습니까?”


무디는 죄를 깨달은 사람을 집회 장소 앞 쪽에 높인 ‘결단의 자리’(Bench of Decision)로 나오도록 초청했단다. ‘죄인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는 호소방식이 대중 전도 집회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단다. 이런 모습은 한국에서 부흥집회를 할 때 앞으로 불러내는 구원 초청에서도 많이 경험한 것이지. 어떤 역사가는 무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지. “십자가까지는 아르미니안주의자요, 그것을 넘어서는 칼빈주의자입니다.” 부끄러워 앞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상담실로 오도록 초청해 그들을 돕기도 했단다.


무디는 스펄전이 1886년 개발해 사용하던 ‘글 없는 책’(검정색→빨강색→흰색)에 1875년 한 가지 색깔(황금색)을 더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어.


사역 말기에 점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무디는 사역의 방향을 교육으로 전환했어. 그는 소녀를 위한 신학교(1879)와 소년을 위한 신학교(1891), 그리고 시카고 성경학교(1889)와 지금의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를 세웠단다. 그가 죽은 후 토레이(R. A. Torrey, 1856~1928)가 학장으로 일했지.


그의 사역은 교회의 경계를 뛰어 넘어 연합체를 형성했단다. 또 교회에는 다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이 회심하는 부흥이 모든 교단에 공통으로 나타났지. 다양한 교단이 무디를 도와 복음 전도 사역에 협력했어. 그들은 금주에 앞장섰고 도덕과 사회 개혁을 겸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단다. 이런 부흥주의자들은 복음뿐만 아니라 삶도 증진시키도록 케직(Keswick) 성령론을 받아들였어. 케직 사경회는 영국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으로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인간 책임이므로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고 보았단다. 둘째,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할 때 제2의 축복 혹은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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