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구본철 화백
삽화=구본철 화백
네덜란드 저지대에는 종교개혁 이후 16세기 중 후반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자리 잡았단다. 국가는 교회를 지원했고 교회는 국가에 충성했지. 국가는 종교적 영역에 간섭하지 않고 자치를 허용했어. 형식적으로는 정교일치였지만, 실제로는 정교분리가 비교적 잘 이루어졌단다. 국가는 교회를 보호했어. 교회당 시설을 국가가 책임지고 목회자의 생활비를 국가가 지불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국가는 영적인 교회 일에 관심도 없고 간섭도 하지 않았어. 1618/19년 도르트(Dordt) 총회 이후 거의 200년 동안 교회 총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단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네덜란드는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 당당히 독립국가로 등장한 이후 황금기를 영위했어. 국력은 부강해졌지. 하지만, 영적 상태는 하강곡선을 그었단다. 인본주의적 계몽주의가 팽배했어. 지성은 탄탄해졌지만 신앙은 나약해졌단다.


나폴레옹 점령군이 떠난 후 1813년 영국으로 망명 갔던 빌럼 1세(Willem I, 1772~1843)가 돌아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단다. 영국의 절대왕정을 수입했지. 빌럼 1세는 바타비아(Batavia) 공화국 십여 년 동안 중단되었던 목사 생활비를 다시 지불하며 교회의 마음을 샀어.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도 장악했지.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국왕 아래 예속되고 말았지. 교회는 교회법이 아니라, 국가 헌법에 의해 종교국 집행부에 의해 통치되었지. 교회는 인본주의에 밀려 세속화되고 영적으로 피폐해졌어.


북부 네덜란드의 작은 시골, ‘윌륌’(Ulrum) 교회 목사 헨드릭 더 콕(H. de Cock)이 국가교회로부터 이탈하면서 시작된 교회 이탈(1843년, 아프스헤이딩, Afscheiding)은 수많은 이탈 목사와 교회들을 낳았어. 교회가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스홀터(H. Scholte, 1805~1868), 프란스 미어뷔르흐(G. F. G. Meerburg, 1806~1855)와 그리고 판 랄터(A. C. van Raalte, 1811~1876) 세 사람도 뒤따랐단다. 이들은 교회에서 ‘복음성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거나, 개혁신앙의 요약인 ‘세 개의 일치신조’를 따른다고 교회로부터 쫓겨났지. 판 랄터는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없었어. 브륌멀캄프(A. Brummelkamp, 1839~1919)도 불신자의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다고 면직되었지. 이렇게 시작된 ‘아프스헤이딩’ 교회(1834~1836년)는 150개이고 교인이 1,500명 정도였단다. 국가교회의 1% 정도에 불과했어. ‘캄펀’(Kampen)에 신학교가 세워지던 해(1854년)에는 200개 교회에 4만 명의 교인으로 늘어났지. 종교개혁 신앙을 따른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견뎌냈어.


‘아프스헤이딩’ 이후 국가는 교회의 독립을 약속, 열어 놓았어(1852년). 국가는 교회 건물 관리만 관여하고 나머지는 교회 스스로 운영할 수 있었단다. 직분자를 교회가 세울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교회는 계명주의의 세속주의를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했단다. 교회는 하나님보다 이성과 자연법을 숭상하고 있었지. 레이던 대학의 스홀턴(J. H. Scholten, 1811~1885) 교수는 성경과 신앙고백, 예수님을 믿기보다는 ‘내적 증거’, ‘인간’, 곧 ‘마음의 의지’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단다. 기적을 믿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했어. 더구나 1878년에는 국가교회가 ‘신앙의 확신이나 종교적 이해의 차이 때문에 목사를 거절할 수 없다’(Art. 38)는 법을 만들었지. 목사가 이단 사상을 가르쳐도 신학과 신앙의 이유로 쫓아낼 수 없다는 뜻이야. 국가교회는 올바른 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지.


경건한 성도들이 이런 국가교회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돌레앙시’(Doleantie, 1886년)야. ‘돌레앙시’는 ‘슬픔’ 혹은 ‘애통’이라는 뜻이지. ‘돌레앙시’는 처음에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지만, 암스테르담 교회가 주도했단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가 중심인물이었어. 카이퍼는 개혁교회가 낳은 세계적 칼빈주의 신학자란다. 1892년 ‘아프스헤이딩 교회’와 ‘돌레앙시 교회’가 역사적 합동을 이루었지. ‘페르에이너힝’(합동, Vereiniging)이라고 불러. 이렇게 해서 국가교회 외에 개혁신앙을 파수하고 전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De Gereformeerde Kerk in Nederland)가 생겼단다.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