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이후로 고난의 삶을 살았어. 성경 속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을 읽어보면 그의 고난과 핍박을 아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그의 고난과 핍박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으면 결코 담담하게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육신의 고통은 아주 담담히 말하는 것 같고, 복음의 능력을 말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복음의 능력은 어떠한 핍박이라도, 인간의 한계를 도전하는 극심한 고난이라도 그를 흔들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져.


그런데 요즘은 특별한 곳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아. 너는 어때?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어? 어머니의 경우도 고난을 받는 경우가 그다지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 살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 속에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면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점검해보라고 하기도 하거든.


시대가 바뀌었으니 고난과 핍박이 더 이상 없는 걸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혹시 풍요는 변장된 박해 아닐까?’(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가 한 말을 바꾸어본 거야. ^^ 루이스는, ‘고통, 변장된 축복!’이라고 했거든.) 고난이나 박해는 그 일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고난과 박해의 내용이 달라진 거라고 생각해. 이전에는 혹은 현대에도 특정한 지역에서는 바울이 받았던 고난과 같은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게 하지만 현대에는 풍요와 안일이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게 한다는 거야. 이전과 달리 지금은 풍요와 안일이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 주니까 굳이 하나님을 붙들지 않아도 되는 거지.


만약에 어머니의 생각대로 풍요와 안일이 변장된 박해라면 이전의 박해보다 더 심각한 거라 생각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독교의 삶의 원리대로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지 않고도 삶의 위협이 없으니 더더욱 하나님 중심의 삶에 무뎌지는 거지. 기독교인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못하게 하니까!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가난하게 혹은 비참하게 살아야한다거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거나 힘들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거 알지? 이전과는 내용이 다르겠지만, 하나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고난과 박해는 언제나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야한다는 거야.


네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이 정도면 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네 앞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없는 게 아니야.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 중심 혹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뎌지게 하면 그것이 더욱 심각한 박해라는 걸 알아야 해.


고난이 변장된 축복인데 고난만을 바라보면 축복을 볼 수 없잖아. 비록 고난으로 인해 힘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하는 것처럼, 풍요가 변장된 박해라면 풍요만 바라보다가는 박해로 인해 너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에서 멀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변장된 박해를 잘 분별하며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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