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1801년 남부 켄터키(Kentucky)의 케인 리즈(Cane Ridge) 장로교회를 담임하던 바톤 스톤(Barton W. Stone, 1772~1844) 목사가 제2차 대각성(The Second Great Awakening, 1790~1840)의 불을 집혔단다. 스톤 목사는 자기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 성도들을 불러 모아 넓은 초원 위에서 집회를 했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해. 야외 집회에서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례도 집행했다고 한단다. 장로들이 심사하고 성만찬에 참석할 자와 세례를 받을 자를 결정했어. 성례는 물론 주일에 행했지.


집회에는 여러 교파가 참여했단다. 침례교와 감리교, 장로교 목사들이 연합했어. 낮과 밤에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했어. 아예 먹을 것을 준비해 텐트를 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먼 곳에서도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감정적 긴장과 정서의 고조로 인해 큰 소리로 울며 울부짖었어. 어떤 사람은 몸을 벌벌 떨기도 했고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지. 신비한 체험과 경험이었어. 이런 감정적인 동요는 집회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단다. 이 연속 야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2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해. 이것이 제2차 대각성의 시작이었어.


사실 스톤 목사는 정통 장로교회 노회제도와 질서, 그리고 신앙고백을 반대했지. 그는 장로교회를 떠나 ‘크리스천 교회’(Christian Church)를 설립했단다. 장로교회를 개혁하려던 아버지 캠벨(Thomas Campbell, 1763~1854)과 아들 캠벨(Alexander Campbell, 1788~1866) 목사도 유아세례를 폐지하고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스톤이 세운 교회에 가입했지. 또 이렇게 제2차 대각성 기간 동안 기성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들이 모여 ‘제자교회’(Church of Disciple)와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를 이루었어.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교단들이야.


그들의 공통점이 있단다. 첫째, 교리의 차이로 교회가 분리되는 것을 반대했어. 둘째, 순수한 원시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단다. 셋째, 교회의 부패와 분열을 제거하기 위해 노회를 탈퇴하여 독립적인 교회를 만들었어. 넷째, 그들은 ‘교단’(Denomination)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냥 성경에 나오는 이름 그대로 쓰기를 원했지. 상당히 순수해 보였고 뭔가 기성교회와 달라 보였지.


교리적 논쟁으로 지친 많은 사람이 이런 교회들로 몰려왔단다. 그들은 전통적 개혁신앙인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거부했어. 유아세례도 거부했단다. 제2차 대각성의 전도자들은 모든 사람과 평화하며 관용했어. 그 외에도 ‘개혁가들’(The Reformers) 혹은 ‘제자들’(The Disciples), 그리고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라는 새로운 교회가 생겨나고 비교적 빨리 성장했단다.


장로교회도 성장했지. 제임스 맥그리디(J. McGready, 1763~1817)는 장로교회 목사로 천막집회를 통해 수백 명의 사람들을 회심시켰어. 제1차 대각성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했다면, 제2차 대각성에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단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의 신학이 강세였지. 제2차 대각성의 결과 부흥을 지지하는 컴벌랜드 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가 주류 장로교회에서 떨어져 나왔어.


침례교회는 제2차 대각성의 영향으로 1812년 20만 명의 신도에서 1850년에는 100만 명을 넘길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단다. 그들은 감정적이었고 단순한 찬송과 음악을 사용했어. 일반 서민들에게 잘 어울렸어. 이들 중에는 엄격한 예정론자인 특수 침례교도들(The Particular Baptists)이 있었어. 철저하게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었지. 하지만,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아르미니안의 자유의지를 추종했어.


감리교회도 제2차 대각성의 흐름을 탔단다. 1784년에 1만5천 명의 신자가 있었지만, 부흥운동의 결과 1816년경에는 20만 명의 신도로 성장했지. 존 웨슬리의 동역자 에즈베리(F. Asbury, 1745~1816) 감독은 교회를 위해 결혼도 포기했어. 그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미국 감리교회에 전설적 인물이 되었단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대학 교육도 받지 않았어. 그의 소탈하고 열정적인 모습이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주었지. 하지만, 에즈베리의 지나친 독재에 반대한 사람들이 모여 ‘공화 감리교회’(The Republican Methodist Church)를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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