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이제 존 웨슬리와 감리교회가 교회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까?


첫째,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국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야외에서 설교했단다. 본래 자기 교구 안에서만 설교할 수 있는 데 그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설교했지.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어.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The world is my parish)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관습을 깨트렸단다. 설교는 교회 건물 안에서만 한다는 통념을 넘어섰던 거야. 이런 그의 태도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질서를 깨뜨려도 된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셈이지.


둘째, 존 웨슬리는 정규 신학과정에서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를 설교자로 세웠어. 그의 조직이 커지면서 조직을 돌보고 일할 일꾼이 부족했지. 평신도 가운데서도 은사가 있다고 판단되면 목사로 안수해 세웠단다. 목사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어.

존 뉴튼의 찬송가


44장 지난 이레 동안에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윌리엄 쿠퍼의 찬송가

207장 귀하신 주님 계신 곳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로


셋째, 존 웨슬리의 사역은 잉글랜드 국교회와 사회가 무지와 방탕에 허덕이고 있을 때 생명력을 불어넣었어. 찬송 작가 존 뉴턴(John Newton)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노예제도 폐지), 존 하워드(John Howard: 악질 감독 제도를 개선),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주일학교 운동의 선구자),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8세기 후반의 잉글랜드 최고의 시인)같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었어.


넷째, 존 웨슬리의 사역은 성도들에게 선교의 열정을 불어 넣었단다. 1792년 윌리엄 케리가 주도하는 침례교선교회가 조직되고, 1795년 초교파적 ‘런던 선교회’, 1796년 ‘스코틀랜드 선교회’와 ‘글래스고우 선교회’, 1799년 ‘국교회선교회’, 1804년 ‘대영성서공회’가 세워지는 데 영향을 미쳤어.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22장 만유의 주 앞에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34장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126장 천사 찬송하기를
164장 예수 부활했으니
170장 내 주님은 살아계셔
174장 대속하신 구주께서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388장 비바람이 칠 때와
522장 웬일인가 내 형제여
595장 나 맡은 본분은


다섯째, 존 웨슬리의 사역은 주일학교 운동에서 큰 영향을 미쳤단다.


여섯째, 동생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는 지금까지도 세계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


일곱째, 존 웨슬리는 소그룹 조직(Band)을 통해 그 영역을 확장했고 이 구역 혹은 속회 모임(Class)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여덟째, 존 웨슬리는 중앙집권적 교회 통치를 위해 감독제를 선택했어.


아홉째, 존 웨슬리가 가졌던 신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정론에 있어서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따랐다는 점이란다. 그는 정통 개신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며 유아세례를 인정해. 하지만, 칼빈주의 교회가 수세기 동안 정체되고 있는 이유를 칼빈의 예정론과 선택교리 탓으로 돌렸단다. 예정교리가 사람의 회개와 회심으로의 초청을 거절하기 때문이라며 싫어했지. 중생을 위한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나 선택을 강조했단다. 회개와 회심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설교를 많이 했지. 동생 찰스 웨슬리는 형 존 웨슬리가 스스로 목사 안수한 것을 반대했고 신앙지상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


조지 휫필드도 이 점에서는 존 웨슬리를 비판했지. 여러 번 편지로 의견을 나누었지만 결국 일치점을 찾지 못했단다. 존 웨슬리는 1770년 칼빈주의를 ‘신앙에 독’이라고 비난했고, 1778년에는 예정론을 거부하고 ‘아르미니안 매거진’(Arminian Magazine)을 출간하기까지 했어. 존 웨슬리는 평생 4만 번이나 설교했다고 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진 목사였어. 하지만, 그는 정통 개혁신앙인은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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