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합당한 예배(8) -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교인들은 예배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던데요. 용서받았으니 이제는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것인가요? 왜 예배하고 나면 더 뻔뻔하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며 살까요? 예배가 교인들에게 면벌부를 난발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셨죠? 그럴 수 있습니다.


교인이라고 예배 한번 했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요? 평생 예배했는데 바뀌지 않았다면 문제일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교인들은 예배하고 나서 마음에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께 예배했으니 이제는 안정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으니까요. 문제는 예배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예배하고 나면 의기양양해지고 이제는 내 뜻대로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예배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라는 파트가 있다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라면 그 다음 파트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입니다. 이 파트에는 십계명 선포-죄 고백-사죄 선언-감사찬송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이런 파트가 필요한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 순서를 예배에 도입하려고 할 때 제네바 시의회가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제 겨우 고해성사로부터 벗어났는데 다시 목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순서가 로마가톨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칼빈은 이 순서를 계속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라는 파트는 개인적인 죄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적인 죄고백입니다. 공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하는 것은 사적으로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로운 방식이 아니라 회중에 속해서 자신의 죄를 고합니다. 공적인 죄고백이라고 하기에 한 사람씩 나가서 자신의 죄를 발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지만 회중에 속해서 회개합니다. 즉,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단 9:3-19). 이것은 다니엘이 회개기도 하면서 자기의 조상들의 죄를 고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공개적인 것을 넘어서 공적이어야 한다


목사는 먼저 ‘십계명’을 낭독합니다(출 20:2-17; 신 5:6-21). 구약시대에 주신 이 언약의 열 가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열 가지 말씀에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할 것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 전반을 살피면서 회개해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우리가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의 그 어떤 회개로도 돌이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회중은 공적으로 ‘죄고백’을 합니다.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수치를 당해야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도 고백했습니다. 모친이 죄 중에 자기를 잉태했다고 말입니다(시 51:5). 모친에게 죄를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자신은 죄로 뒤범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께만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시 51:4).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면서 고백한 것인데 영화 ‘밀양’에서처럼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범한 아무리 사소한 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엄하신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죄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고백은 철저해야 합니다. 가면 갈수록 더 큰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다.

회중에 속해서 공적으로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통해 ‘사죄선언’을 해 주십니다(히 7:24-25; 딤전 1:15; 요일 2:1-2 등).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의 선포가 회중을 새롭게 합니다. 회중이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의 말씀 선포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죄의 말씀이 창조의 말씀이어서 새로운 심령을 창조합니다. 회중은 사죄의 말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공적으로 사죄의 말씀을 선언해 주시는 것이 없다면 신비주의처럼 내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죄의 말씀을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사죄의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들을 수 있지만 성경말씀을 통해 사죄선언을 할 때 우리는 심령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용서에 관한 그 말씀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말씀을 대하기도 하지만 공적으로 사죄의 말씀을 선언해 주실 때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 때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이 되고 동시에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배하고 나서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죄인임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딤전 1:15).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우리가 죄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함께 알고, 함께 나눕니다. 죄인들의 연대감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연대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공적으로 함께 죄를 고백했기에 우리는 그 무서운 죄로부터 결별할 수 있는 은혜를 힘입습니다. 죄 지었다고 고백하고는 다시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임을 알고 죄를 진저리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죄를 공적으로 고하고, 용서의 말씀을 공적으로 들은 성도는 이제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갈 5:24). 마귀의, 율법의 어떤 정죄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예배를 통해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대로 죄지어도 되고, 다음 번에 다시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 더 큰 죄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악까지도 실행한 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살아갑니다. 예배한 사람은 죄 짓는 것을 예사로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용서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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