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합당한 예배(3) -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대면예배를 왜 그렇게 고집합니까? 대면예배 하는 것이 목숨 걸 일입니까?’라고 물으셨죠. 최근에 교회들이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을 보고는 섬뜩하다고 말했죠? 밀집해서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천만한데 왜 그렇게 모이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야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역사회에 바이러스가 전파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더니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모여서 예배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부름 받았기에 예배한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서 부름 받아 나온 이들만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부름 받은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배의 첫 파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름’, ‘하나님의 인사’, ‘하나님을 찬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기에 나아와서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라고 충성을 고백(시 124:8)하면 하나님께서 나아오셔서 인사해주시고(롬 1:7, 계 1:4-5)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송을 올려 드립니다(새찬송가 3,4,7장-글로리아 파트리). 예배의 이 시작부분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일에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에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를 떠나서 아무리 궁구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때에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주신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때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아 나온 이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 주일이요,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 예배한다


예배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몇몇 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경건모임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온 회중이 함께 모이는 것이기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모일 수 없는데 비싼 월세를 주어 가면서 예배당을 유지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상가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배당이 성전이기 때문에 유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요 2:13-22). 우리가 한 장소를 정하여 함께 모여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곳이 성전이 됩니다(고전 3:16).


예배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도 정해 놓아야 합니다. 야외에서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온 교인들이 주말을 맞아 수련회를 갔는데 주일 아침에라도 예배당으로 가서 예배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 수련회장에서 예배해도 되는지 논쟁하기도 합니다. 그 수련회장에서 예배해도 됩니다. 그런데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을 배려해서 그리고 그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려는 외부인이 있을 수 있기에 예배당으로 가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핍박시 산이나 들에서, 심지어 무덤에서 예배했습니다. 나중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예배하다가 그 무덤 위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회중 전체가 특정한 장소에 모여야 합니다. 회중이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몸을 끌고 가서 예배한다


코로나사태로 인해 개신교인들은 함께 모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맞습니다. 예배는 마음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몸의 문제입니다. 예배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휴일인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서, 몸을 끌고 예배당으로 갑니다. 예전에는 성경책을 끼고 교회 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이제는 차량을 이용하기도 하고, 굳이 성경책을 끼고 예배당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핸드폰에 성경찬송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일에 우리의 몸을 일으켜서 예배당에 가는 것입니다. 그 곳에 다른 기독교인들도 나아옵니다.


예배 자체도 몸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을 끌고 예배당으로 가서 예배할 때에 우리의 몸이 새롭게 형성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는 몸을 끌고 가서 하는 것이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몸을 새롭게 합니다. 예배 때 일어서고 앉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 하나하나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움직이고 바꾸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배 순서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익히게 해 줍니다. 예배에 나의 몸을 맡기면 그 예배가 우리의 몸마저 새롭게 하고, 복된 습관을 형성시켜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을 이루어 예배하고 세상으로 들어간다


내가 예배당으로 가면 그 곳에 다른 성도들이 나아옵니다. 우리는 함께 만납니다. 이렇게 몸과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 4:12, 16). 예배당에 와서 다른 성도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격합니다. ‘한 주간동안 내가 홀로 외롭게 살았는데, 나 혼자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했는데 저 성도도 동일하게 고난 받았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다른 성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됩니다. 예배에서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예배하면서 서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고 충분히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닙니다. 세상 사는 것이 힘드니까 하루 정도는 예배당에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일에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했습니다. 이제 주일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모입니다(요 17:11,15). 예배에서 우리의 두 가지 신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시민이요 동시에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시민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합당하게 예배하면 세상이 우리의 예배를 알아주고 잘 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악의적으로 모욕하는 것이 세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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