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원장), 기능론적 시각으로 인간의 자격 바라보는 것 위험, 교회 영향력 회복하는 일에 배나 힘써야

▲ 시민단체들이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재의 낙태죄 위헌소원 판결에 앞서 낙태죄 폐지 반대 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이 자리에 아이들도 함께했다. 기독교보 ©
▲ 시민단체들이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재의 낙태죄 위헌소원 판결에 앞서 낙태죄 폐지 반대 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이 자리에 아이들도 함께했다. 기독교보 ©

2019 헌재의 낙태죄 위헌 판결과 핵심 사항


66년 만에 소위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다. 지난 4월 11일 헌법 재판소(이하 헌재)는 형법 269조 1항의 자기낙태 처벌 조항과 270조 1항 임부의 촉탁에 따라 낙태시술한 의사를 처벌하는 조항은 헌법 10조(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에 배치되는 조문으로 판단하면서, 이 법조항을 헌법에 합치되도록 2020년 12월까지 개정할 것을 입법부에 주문했다. 위헌과 합헌 판단을 내린 재판관의 비율은 7대 2였다.


헌재는 헌법 10조가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개인의 인격권이 보장되고, 여기서 개인의 자기 결정권이 파생된다고 보았다. 개인의 자기 결정권이란 모든 사적 생활영역에서 자기 삶의 방식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를 임신한 여성에게 적용하면,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임신상태로 유지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이다. 따라서 낙태죄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조항이므로 헌법에 배치되고, 따라서 이 조항은 마땅히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는 태아의 신분에 대해서 그 자체가 산모와 별개의 생명체로서 생명권의 주체라고 보았다.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따라서 낙태죄 처벌 조항은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국가의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그렇지만 국가는 태아생명보호라는 국가의 공익과 아울러 행복 추구라는 개인의 사익을 균형 있게 보호해야 하는데, 현행 낙태 처벌 조항은 태아생명권에 일방적,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헌재는 이것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국가는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을 중시하되, 여성의 행복권 보호도 그에 못지않게 중시해서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자적인 생존을 할 수 있는 상태인 임신 22주 내외에 이르기 전까지는 산모가 그 보호의 정도와 수단을 달리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이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 기간에는 여성이 태아 보호 정도와 여부를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을 국가가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언명했다.


1973년 미국연방 대법원의 판결과 유사


헌재의 이번 결정 내용과 논리는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결정과 매우 흡사하다. 미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금지하는 텍사스 주 법을 심리해 달라는 Roe vs. Wade 사건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텍사스 주 법이 미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기본권에는 사생활 권리와 자유가 핵심이라고 보았다. 연방대법원은 소위 사생활권을 이렇게 정의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사생활권은......한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포함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그러면서 낙태에 대한 여성의 사생활권은 임신 삼 개월까지 해당하는 첫째 삼 분기(first trimester)에는 무제한적이고, 태아의 모체 밖 생존가능성(viability)이 시작되는 시점인 둘째 삼분기가 끝나는 24주 째 까지는 낙태가 여성의 건강 보호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주정부는 낙태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즉 여성의 신체적 사회적 보호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열등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권을 국가가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성경은 태아의 성격과 지위를 어떻게 말하는가?


헌재와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사생활권을 태아의 생명권보다 가볍지 않은 가치에 두는 이유는 22주까지의 태아는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헌재는 태아를 단지 “생명체”,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한 존재로 명시하고 있는 바, 태아의 신분과 지위는 산모의 그것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이러한 헌재의 생명에 대한 결정적인 기준은 ‘모체 밖에서의 독자적 생존 능력’에 있다. 22주 이후의 태아는 인격권을 보장받을 만한 최소의 자격을 지닌 존재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헌재의 이런 인간 이해는 다분히 기능론적 견해로서 인간은 최소한 어떤 인간다운 특정한 기능과 능력을 지니고 발휘해야만 인간의 자격을 지닌다고 보는 시각이다. 물론 그 기준은 사회가 합의하여 정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까? 성경적 인간관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적인 존엄을 지닌 존재로 대하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우하도록 명령하고, 살인한 자에게는 극형으로 책임을 묻도록 하셨다(창 9:6). 그럼 22주 전까지의 태아는 “인간에 근접한 상태”의 존재로 보는 시각은 성경적 시각과 합치할까? 하나님은 태아를 어떻게 여기실까?


시편 139편은 태아의 가치와 도덕적 지위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 그리고 편재하심의 속성을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남을 감탄하고 이렇게 노래했다. “주께서 내 내장(장부)을 지으시고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13절). 시인은 하나님이 모태에서 자신을 지으셨다고 고백하고 이 만드심이 정말 “기묘”하다고 노래한다(14절). 그가 사용한 “지으셨다”의 히브리어 ‘카나’는 ‘형태를 만들다’(to form) 또는 ‘창조하다’(to create)라는 의미이고 “만드셨다”의 히브리어 ‘샤칸’은 ‘조직하다,’ ‘뜨개질하다’(to knit)라는 말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실 때 뜨개질하듯이 직조(織造)하셨다고 노래했다. 시인은 이어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16절)라고 노래했다. “형질”의 히브리어 ‘골람’ 은 아직 특정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덩어리를 말하는데, 굳이 생물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배아’(embryo)로 번역할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직접 조성하셨음을 고백하고 그것의 기묘함을 감탄하고 노래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하나님이 현재의 자신을 아시고 보시며 붙드시는 분(1-6)이심을 감사하며 노래하는데 하나님의 시인에 대한 보호와 사랑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현재의 자신만이 아니라 태아와 배아로 있었을 때에도 미쳤음을 노래한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능이 없었던 모태의 태아였을 때의 자신을 아시고 감찰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형상으로 직접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생명이 하나님과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아시고 감찰하시는 사실이 그 존재의 인간됨과 가치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라고 말씀하셨음을 선지자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잉태되게 한 순간부터 그를 이미 아시고 그를 돌보시고 이후 줄곧 그를 인도해오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인간됨은 그 존재가 어떤 특정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된 존재는 모태에서부터 어떤 발달 단계에 있든지 관계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을 자격을 지닌 인간임을 성경은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말한다.


구약과 신약의 여러 곳에서 복중의 태아를 가리키면서 어린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출애굽기 21: 22절에서 복중의 태아를 가리키면서 어린이(child)의 뜻을 가진 ‘옐레드’로 표현했고, 신약에서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기(눅 1:41, 44)를 표현할 때 예수님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온 어린이들(눅 18:;15) 지칭하는 단어인 ‘브레포스’를 사용했다. 이렇게 보면 잉태된 태아는 비록 22주 이전에 있다고 하더라도 모체 밖에 있는 아이들과 다르지 않는 존재로 유추할 수 있다. 태아도 어린이들과 그리고 우리와 다르지 않는 하나님의 감찰과 보호를 받는 존재이고 인격체이다. 단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의존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로서 최상의 돌봄이 필요한 가장 약한 인간이다.


기독교 윤리적 성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 헌재의 낙태죄 위헌 판결을 보면서 우리 교회는 무엇을 인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번 결정과정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된 헌재의 인식과 정서는 단순히 다수 재판관들만의 시각과 정서가 아니다. 이 시대사조와 문화의 전반적인 정서와 인식이고, 이것이 점점 대세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태아는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다]”라고 태아를 여성과는 별개의 생명체로 인식하면서도, ‘모태 밖 독자적 생존 가능성’이 갖춰지지 못한 태아의 생명권을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더 중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헌재의 시각을 교회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생명권은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권리가 아닌가? 이것을 하위 가치인 자기 결정권과 등가치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모체 밖 독자적 생존능력과 같은 기능론적 시각으로 인간의 자격을 바라보게 되면 이는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과 같은 위험한 길로 들어선 것과 다르지 않고 이런 시각은 논리는 곧 식물인간, 자기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의 환자, 그리고 중증 장애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여성의 선택권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때론 태아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반생명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시각은 이제 코끼리가 한 다리를 텐트 안에 집어넣은 것처럼 우리 사회 안에 쑥 들어와 버렸다. 이것은 곧 문화적 대세로 자리 잡아 사회전반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의 파문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을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군내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 6항을 대한 헌법소원이 다시 제기 될 것이고 세 차례에 걸쳐 이것을 합헌으로 헌재가 판결했지만, 그 때와 재판관이 거의 바뀐 현재 이번에 자기결정권의 가치를 강조한 헌재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군형법을 위헌으로 판결한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은 반기독교적 사회 기류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자다가 깰 때가 이미 되었다. 교회는 경성하며 대책을 마련하고 대응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깨어있고 유능한 적잖은 평신도 전문가들이 반기독교적인 제도와 악법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서로 결집하고 연대하여 헌신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교회도 이와 함께 힘을 모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장 낙태관련법을 개정하고 만들게 될 향후 1년 반 동안, 국회의원들이 낙태가능기간을 가능한 짧게 정하도록 설득하고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악을 없앨 수 없지만 악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더 치밀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을 보면서 갑자기 2018년 5월 25일에 유럽 아일랜드가 국민 투표를 통해 산모의 생명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수정헌법 제 8조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를 교회의 영향력 감소와 연결시켜 분석 성찰한 한 가톨릭 신부의 기고 글이 생각났다. 로마 가톨릭의 영향이 가장 강했던 아일랜드에서 국민의 3분의 2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폐지하는데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아일랜의 교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 신부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자성적 분석을 내렸다.


이 사건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제 더 이상 영적으로 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증거인데, 그는 그렇게 된 이유를 크게 몇 가지 들었다. 명목적 교인과는 달리 실제적 교인의 급속한 감소, 외적 개혁을 강조하면서도 성직의 내적 개혁에 소극적이었던 교회에 대한 실망, 그리고 교회 성직자들의 성적, 윤리적 타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이 성도들의 실제적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그 신부의 이런 분석과 진단은 비단 아일랜드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우리 한국교회도 한번 자성하며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 사분의 일이 교회에 출석하던 때가 있었던 한국 교회는 이미 가파른 하락세에 놓여 있고, 청소년들과 20대, 30대 청년들의 교회 이탈과 부재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자격 없는 목사들의 성 추문과 비윤리적인 사건들은 더 부풀려져 시민들에게 중계되고 있다. 교회의 신뢰성과 영향력 감소가 현재처럼 심한 경우가 없는 듯하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교회는 나라가 반기독교적인 제도와 법을 만들어 쇠락의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대 앞으로 더욱 사회적 대응을 조직적으로 해 나가야 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끗하게 함으로 도덕적 공동체로 거듭나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도록 더욱 노력해야할 것이다. 사회가 교회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일에 이전보다 배나 힘써야할 때가 되었다. 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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