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기념교회 북상교회와 박기천 전도사

전쟁이 무섭다 하여 교회와 양 떼를 버려둔 채 피난을 가거나 교회당을 비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양자로서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에 하나 인민군에게 잡혀가 순교를 당하면 더 바랄 것 없는 영광이요 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도리어 인민군에게 끌려다니며 이용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니 이 일에 대비해 주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북상교회의 시작과 박기천 전도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북상교회. 거창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이 시골 교회는 북상 지역의 복음 전파를 통한 구원을 위해 설립됐다.

이 지역은 1930년 경 노한상이 개인적으로 전도하다가 호주선교부에서 파송한 주간학교선생 곽남순이 합류하면서 성도들이 점차 늘어났으며, 이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역의 부인들이었다. 초창기부터 3년까지 평일에는 용강정에서 모여 예배를 보다가 주일에는 동네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위천교회에 출석했다. 이후 1933년 부인들의 노력으로 예배 처소를 마련했고, 1934년 봄에 거창선교회가 황보기 전도사를 파송해 임시로 3개월 간 전도하게 했다. 이어 고운서 전도사가 수개월간 전도에 힘썼으나 지방 인사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게 돼 김동선·곽남순 부부 전도사가 파송됐다. 결국 이들 부부 전도사의 헌신으로 인해 지방 인사들의 호의를 얻게 됐고 북상교회의 기반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 1948125살의 젊은 박기천 전도사가 북상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박 전도사가 부임할 당시 북상교회의 목회환경은 좋지 않았다. 해방 직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나라가 나눠졌고, 공비들이 사방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등 혼란한 전국이었다. 북상교회가 있던 이 지역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정부의 색출을 피해 민가를 떠나 산으로 잠입했지만, 밤이 되면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북상교회 인근까지 내려와 양민을 괴롭혔다. 이들로 인해 박 전도사의 목회는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박 전도사의 천성은 이런 위협에도 묵묵히 전도에 힘쓰는 목회환경을 만들게 됐으며, 전임교역자 없이 신앙생활을 해온 성도들에게도 깊은 신뢰를 쌓아갔다.

사랑의 실천, 그리고 변화

북상교회의 장년 성도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나이든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박 전도사도 쌀 두가마니가 전부였지만 이들의 실정을 알고 생계의 모든 것을 책임졌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도 귀감이 됐고, 지역복음화의 초석이 됐다.

북상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유교적 전통이 강한 임씨 집성촌이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박 전도사는 부임한 직후부터 주민들을 붙잡고 전도에 매달렸지만 이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박 전도사는 스스럼없이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인위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닌 친근한 주민의 일원으로 녹아져 들어갔다. 때론 형제처럼, 때론 친구처럼, 때론 아버지처럼. 그리고 가난한 형편에도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다. 콩 한쪽도 이웃과 나눴다.

박 전도사를 기억하는 당시 주민들은 그가 식사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양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살았으며, 그마저도 언제나 이웃이 가장 먼저였다. 그래서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쑤였다. 궁핍한 삶이었지만 근심이나 지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박 전도사의 얼굴은 그 어느 부자보다도 여유로웠고 넉넉했다.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했다. 이런 삶 자체가 그에겐 기쁨이었다.

그가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조용히 뒤에서 도움을 준 부인 이진포 사모의 역할도 컸다. 이진포 사모는 생계를 위해 동네 사람들의 삼베 길쌈, 명주 길쌈을 받아 부지런히 일했다. 나이가 젊으니 손이 빠르고 눈이 밝아 명주 길쌈을 잘한다는 소만이 나자 여기저기서 일감이 들어왔다. 이진포 사모는 임금 대신 받은 삼베나 명주 옷감을 되팔아 살림에 보탰고, 박 전도사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래서 식량이 모자라 끼니를 거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었다. 성경을 사랑했고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살았다. 성경이 있었기에 배고픔과 삶의 어려움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삶은 주변을 점점 변화시켰고 유교적 전통이 강한 임씨 집성촌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됐다.

여보, 당신은 순교해야 할 사람입니다

배는 고팠지만 기쁨으로 충만했던 박 전도사의 목회생활에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부인 이진포 사모가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박 전도사가 산으로 기도를 하러 간 사이 한밤중 공비가 교회를 급습했다. 박 전도사를 잡아가기 위한 습격이었다. 그가 교회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공비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이진포 사모를 폭행하며 겁박했다. 박 전도사 대신 분풀이 대상이 된 이진포 사모는 무자비한 폭행으로 어깨가 골절돼 수개월 간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적인 충격보다도 정신적 외상이 더욱 컸다.

공비의 습격 이후 이진포 사모는 자주 경기를 일으켰고 평소에도 호흡에 곤란증상을 겪었다. 입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형편상 그럴 처지도 아니어서 민간용법에 의지해 자연치유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골절상이 완치된 이후에도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됐다.

부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면서 박 전도사의 고민과 기도는 점점 깊어졌다. 더욱이 공비들의 습격이 점점 잦아지자 부인을 위해 임지를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리고 박 전도사는 당시 거창읍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주남선 목사의 소개로 가천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됐다.

한창 부흥중인 북상교회를 떠날 생각에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2년간 온 힘을 다해 섬긴 북상교회. 배고프고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부인의 건강 악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괴로운 결정이었다.

1949년 가천교회로 임지를 옮긴 박 전도사는 지역 복음화를 위한 적극적인 목회계획을 세우고, 성경읽기의 생활화, 주일성수, 새벽기도 후 가정예배 생활화, 기도의 생활화, 전도의 생활화 등 성도들의 신앙을 성장시킬 목표를 세웠다. 더불어 새로운 목회지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목회자로서의 꿈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켠에 걸리는 부인 이진포 사모. 공비를 피해 목회지를 옮겼지만 이진포 사모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그리고 1950716일 주일 아침 7시경 세 살배기 어린 아들과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남편을 뒤에 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여보, 당신은 순교해야 할 사람이니 내가 먼저 가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홀가분하게 갈 길을 갈 수 있지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모든 슬픔과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에만 전념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1950625일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하지만 8월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마지노선으로 한달 내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인민군을 막아냈고,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인천과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926일 전세가 불리한 인민군은 양민포로를 북한으로 데려가기 어렵다고 판단, 함양읍 당그레산 깊은 골짜기에서 200여 명을 총살했다. 200여 명의 포로 중에 박 전도사도 있었다. 이날이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었다.

이진포 사모의 말처럼 그는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마지막은 어떠한 공포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주님께 기도로 매달렸을 뿐이었다. “주여,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만이 흘러나올 뿐. 인민군의 폭압적인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말씀, 명령,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27살의 짧은 생애였지만, 가난한 전도자의 길에 만족했고 부정과 불의와 결탁하지 않고 기쁜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음은 의롭게 사는 것, 깨끗하게 사는 것, 진리를 따르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의 피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자랄 수 있었다.

복음 증거의 날들

박기천 전도사의 아들 박래영 목사(부산성도교회 원로)는 현재 은퇴 후 홀로 박 전도사의 정신을 기리는 순교자기념관을 조성하고 있다. 워낙 어릴 때 부모가 순교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귀한 순교적 삶을 기억하고 이를 이어받아 하나님 나라의 충성된 일꾼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묵묵히 이 일을 하고 있다.

단지 박기천 전도사가 자신의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순교가 교회의 영광이고, 순교자가 교회의 보배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참된 순종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삶인지를 신앙의 후배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다.

박래영 목사는 박기천 전도사는 순교자였다. 순교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증거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듯이 박기천 전도사의 짧은 생애는 복음 증거의 날들이었고, 그것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한 증거였다면서, “박기천 전도사가 순교한지 7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그 후손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고, 그가 남긴 거룩한 삶의 흔적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과 경계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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