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도하지 않으세요? 교회 본질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연인을 위하여 베토벤이 작곡한 A단조의 서정적인 곡인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그 유명한 노래가 언제부터인가 골목에서 들리기 시작하였다. 교회 아이에게 물어봤다. “저 음악 소리가 뭐지?” “청소차 소리요.”

아뿔싸. 그렇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본질을 벗어나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 베토벤이 와서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서글펐을까? 교회도 성도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교회 본질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을 살리는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본분을 잃어버리고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병이 들고 만 것이다. 몸에 병이 들면 건장했던 사람도 힘을 잃는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든다. 판단하고 비방하고 힘겨루기를 하며 고통을 준다. 사소한 일들로 마음이 상해 괴롭다.

교회는 사람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상한 사람을 싸매주고 허다한 허물을 서로 덮어주는 곳이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며 사랑으로 살리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아프다. 그리고 성도들이 아프다. 아픈 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마비돼 버린 것이다.

엘리제는 죽었다. 그리고 골목에서 청소차만이 슬픈 그 노래를 울리며 지나간다.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떤가. 교회는 어떻게 병들게 됐나. 전도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병이 들게 돼 있다.

목이 마르다. 밤길을 걷다가 골목 가득한 십자가는 참 자랑스러웠었다. 반가운 십자가, 감사한 십자가. 어두운 밤하늘 밑에 지새우고 골목을 비춰주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십자가는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전도를 마치고 늦은 밤 돌아오는 길에 십자가를 바라봤다. 갑자기 온몸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소름이 돋으며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서러웠고 슬펐다. 한국교회 때문에. “왜 전도하지 않으세요?” “예전에 하다가 그만뒀습니다.” “해도 안 되니까 이젠 그만뒀습니다.” 하기는 해야 할 일인데 안 되니 그만둔 거란다.


전도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정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일까. 그래서 누가 만들어 낸 말이 있다. 전도는 달란트라고,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그런 표현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결정하고 그 뒤로 자신을 숨기고 안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열매 없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이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 비유다.


전도할 때 열심히 나간 적이 많았다. 하지만 전도는 욕심이나 열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걸 한참 후 깨닫게 하셨다. “하면 된다. 해 보자하고 두 손을 불끈 쥐고 목청을 높이는 분위기는 사라진 것 같다. 힘써 열을 올려봤자 결과물이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것 같다.


영혼 구원의 무기는 성령이다. 제자들은 기도했고 성령의 강림을 경험했다. 그 힘으로 길거리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할 때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 수많은 무리가 회개하며 주께 돌아왔다. 우리가 구할 것은 성령이다. 간절함으로 힘을 다해 임하실 때까지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도 내쫓으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3:14~15)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3:27)


말씀은 진리다. 이 말씀은 전도자에게 생명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내게는 능력이 없었다. 나 자신 하나도 버텨 낼 힘이 없는 무능한 존재였다. 목회하기 전 경로당에 찾아가 몇 달을 봉사한 적이 있었다. 전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열심히 섬겨보았는데 한 분도 모셔올 수 없었다. 나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힘이 빠지고 저절로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교회는 저절로 성도들이 찾아온다던데.’ 한겨울에 벌벌 떨면서 전도지를 몇 주 동안 뿌려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나는 진짜 무능한 사람이었다.


성령이 필요했다.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을 구원시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마음은 목회하기 전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고 있다.


금식과 기도를 일상으로 했다. 체중이 48까지 빠졌다. 금식할수록 영이 더 강해지고 결기가 더해갔다. 마음에 불이 타올랐다. 지금도 어떻게 하든 하루 3시간은 엎드린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나님 앞에 다가서지 않으면 내 영은 죽은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결심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혹여 누가 내게 남길 말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평생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주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보다 더 복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것이 요셉 다니엘 다윗 바울이 승리한 비결이다.

예수님의 피 값을 알고 성도들을 대하는

그 마음이 부흥의 문을 연다!

누구나 부흥을 목말라한다. 특히 목사님들에겐 간절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왜 그리 힘들까? 목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인데 왜 실패하는 경우가 생길까? 평신도 때부터 궁금하였다.


만일 내가 목회할 때 부흥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을 졸이게 한 말씀이 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13:22)


누구는 폐하시고 누구는 세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었다. 다윗은 도대체 왜 그렇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신 것일까?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했던 것은 어떤 부분이란 말인가?


다윗을 찾아 성경을 더듬거리다가 감동이 돼서 사무엘 상하를 4년 반 동안 주일예배 때 연속으로 강해하였다. 그렇게 다윗을 사모하게 되었다. 이때가 교회가 가장 폭발적으로 부흥했던 시기였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주일이 기다려지던 시절이었다.


어리석고 미천한 신출내기 목사였지만 틈만 나면 성경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다윗의 삶을 따라가자 그 은혜 속에 푹 빠졌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이유 몇 가지를 닮고 싶었다. 평생 그 마음을 변치 않게 지키고 싶었다.

다윗의 모습 속에는 책임감, 즉 맡은 자의 확신이 있었다. 사자나 곰에게 끌려가는 새끼 양을 지켜 내는 그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맡기신 그 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드는 다윗, 그에게 힘을 주셔서 그 무시무시한 사자와 곰을 쳐 죽이고 양을 살려내는 다윗, 이것이 맡은 자의 정신이었다. 한 영혼을 품고 씨름하는 그 마음이었다.


종종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 말씀 앞에 우연히 깨달음을 주셨다. 사람은 전혀 존귀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3:11~18)


사람이 이런 존재였다. 칼뱅의 정의처럼 전적 타락이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떻게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됐다는 말인가. 그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20:28)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이게 문제였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온 천하가 다 하나님 것인데 누구에게 값을 지불하고 사람을 사 오신단 말인가!’ 가슴이 벌렁거리는 깨달음 속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죗값을 대신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 그 피 값으로 살려낸 사람, 그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와 있다는 말씀이었다.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10:42)라는 냉수 한 그릇에 담긴 그 비밀, 예수님의 피 값을 알고 대하는 그 마음이 목사의 마음에 살아날 때 하나님은 부흥의 문을 열어 영혼을 맡겨 주신다.


이 말씀은 나를 매우 고단하게 했다. 눈이 무척 내리던 해였다. 밤새 내리고 낮에도 내리고, 또 내리는 눈을 치우고 쓸어도 끝이 없었다. 도시가 아닌 시골이다 보니 교회에서 자동찻길까지는 1.5정도 된다. 폭이 2~4m인 시멘트 농로이다 보니 자칫하면 자동차가 논으로 처박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좌우로 난 길을 합치면 3쯤 된다.


낮에는 그렇다 치고 새벽길이 문제였다. ‘성도님들이 오는 길에 눈이 쌓여있으면 어떻게 이 좁은 길을 올 수 있겠는가. 눈길이란 생각에 아예 새벽기도에 오는 걸 엄두도 내지 못하지 않을까?’ 그래서 빗자루를 들고 길로 나섰다.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면 금방 빙판이 되기 때문에 곧바로 눈을 쓸어내야 했다.


제설 장비가 없던 시절이었다. 쓸고 치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을 쓸고 있을 때 저 멀리 자동차가 들어왔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급기야 손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지더니 껍질이 훌렁 밀려 나가 버렸다. 벌겋게 속살이 올라오면서 피가 흐르고 얼음을 깨던 괭이자루에 손이 붙어버렸다. 어찌나 쓰라리던지 참기 어려웠다.


땀에 젖은 옷을 후다닥 벗어놓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새벽 제단에 서서 찬송을 불렀다. 그때 성도님들의 얼굴, 그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고맙고 감사했다. 귀하고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어찌 눈물 없이 기도가 되겠는가? 그렇게 눈물의 새벽기도 시간을 보냈다. 40일 넘게 눈을 치운 그 시간을 잊을 수 없다.


한 영혼을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울고 기도하게 하신 찬송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그렇다. 목회자가 이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후회도 없을 것이요, 부흥도 이뤄 주실 것이다.

이수훈 목사(당진동일교회) / 구본철 기자(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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