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화요성경공부)는 사람을 변화시켰고 가정을 변화시켜”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엡 1:23) 성도는 지체로서 분량대로 역사해 그 몸을 자라게 해야 한다.(엡 4:16) 우리는 그 몸의 지체다.(엡 5:30) 그러나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부분이 어려웠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은 채 교회를 세운다고 열심을 내고 있었다.

#교회의 주인

가야 할 길을 모른 채 열심을 내는 것이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개척 후 몇 년을 지나 깨달았다. 회중이 늘어가고 교회의 덩치가 불어나고 있을 때 내 안에서는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고 교회가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소유하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혀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빠져들어 가는 구덩이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쨌든 정리가 필요하였다. 돌아보면 그만큼 무지한 상황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관행을 답습하면서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한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익숙해진 예배형태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예수님이 오늘 당진동일교회에 오신다면 무엇을 하실까. 책망하실 것만 같았다.

예수님의 몸이라면 지체는 몸에 붙어서 몸이 원하는 대로 같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머리는 온몸을 움직이는 기능을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 존재 목적이 선명해졌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직접 일러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이시다. 그 구원 사역을 이루신 곳이 십자가이고 그 후 교회를 통해 구원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까지 하셨다.(마 28:19~20, 행 1:8) 이를 모르는 성도는 없을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힘을 다해 교회를 세운다고 열심을 내면서 그 목적이 희미해지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이다. 목적이 희미해진 열심만 남아있었다.

머리가 되신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과는 동떨어져, 정확하게 해 드리지 못하면서 비대해져 가는 교회의 운전석에 내가 앉아 있었다. 교회가 커지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성도가 늘어가는 것도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선명하게 이뤄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데 그걸 놓쳐가고 있었다.

교회의 목적을 깨닫고 평신도 사역교회로 체질을 바꾸기로 하였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일꾼, 평신도 사역 중심으로 교회 체질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신학교를 나온 분들도 사역이 쉽지 않은데 과연 될 법한 일일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숱하게 경험하였다.

목회의 모든 사역을 평신도 지도자들이 하게 하였다. 심방, 돌봄, 전도, 각종 행사 등 제반 사역들을 다 넘겼다. 주변에선 과연 할 수나 있겠느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예수님의 지체로서 자리 잡는 가장 적합한 일이라 생각했다. 평신도 리더를 세우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마주 앉아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론과 목양론을 세워갔다.

그 과정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었다. 상담과 치유, 경청과 공감, 성령체험과 기도, 섬김과 사랑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역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 배운 다음 현장의 사례를 발표하고 그것을 다시 강평하는 식으로 하였다. 점심을 같이하고 오후에는 결석 성도들을 챙기고 1주 동안 돌아볼 심방계획도 세우게 하였다. 그렇게 월요일은 완전히 지도자만 세우는 날로 온 에너지를 투입하였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한번 맡긴 사역은 끝까지 믿고 지원하였다. 지금 그때 세워진 평신도 지도자 1명이 700여 가구를 책임진다. 이분들이야말로 교회의 기둥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예우나 배려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 리더는 영적으로 점점 자라서 이제는 어떤 일이든 목회자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서 감당하는 수준까지 서게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평신도와 이들이 펼치는 사역은 교회에 안정감을 줬다. 사역의 지속성 면에서 이보다 좋은 동역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힘들여 전도해도 교회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이들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새가족을 잘 정착시킬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짜낸 결론이 참여하는 예배였다. 성도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올려드리는 공동체 예배를 구상하였다. 평신도가 주체가 돼 섬기는 예배를 주일 오후 7시, 수요예배, 금요 철야 기도회에 적용하였다.

자리에 앉아 설교만 듣고 가던 성도들이 예배에 직접 참여하도록 월 1회 교구가 돌아가면서 순번제로 드렸다. 준비과정을 통해 교제하면서 한마음이 되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무척 컸다. 성도들은 교회가 내 집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자세는 헌신과 전도로 이어졌고 봉사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목사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성도들로 교회가 채워졌다.

#심은 대로 거둔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전도 후 등록 성도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정착시키고 일꾼으로 세워갈 것인가는 큰 숙제였다. 어렵게 모셔온 성도가 예배에 한두 번 참여한 후 자신은 교회 체질이 아니라는 등 변명을 하면서 나오지 않겠다고 거절할 때 오는 상실감은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그 성도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연약한 지체들마저 덩달아 넘어지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는 절망적이었다. 다양한 양육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었지만, 시행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한참을 헤매다 깨달았다.

결국 정신이 문제였다. 제자훈련에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광인론’이다. 제자훈련에 미쳐야 한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정말 제자훈련에 미쳐 버린 목회자가 얼마나 있을까?

열심을 내는 것과 미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우선 사람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믿음의 사람을 세워가야 한다는 목마름을 온몸으로 느끼고 갈망하는 일 없이는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정착 프로그램을 시행하려고 하니 맡길 일꾼이 없었다. 모두 초신자였고 연약한 지체들인데 누구에게 이분들을 부탁한단 말인가? 맡길 수도 없고 맡을 사람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1999년부터 시작한 게 화요성경학교였다. ‘화요일 누가 교회에 교육한다고 하면 오겠는가.’ 이런 의문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났다. 일단 광고부터 하고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거니 절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화요일 오전에 오실 수 있으신지요?” “뭐하시는데요?” “네, 성경공부를 진행해 보려고요. 성경을 알아야 신앙이 자라지요.” “아, 네….” 그렇게 새신자와의 전화는 맥없이 끊어졌고 출석도 끊겼다. 온몸의 힘이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그때 본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호숫가에 앉혀 놓으신 후 배를 타고 강론하셨다. 설교 내용은 그들 삶의 핵심을 짚어주는 교훈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현장을 다니시면서 임상훈련을 통해 일꾼으로 세우셨다.

어쨌건 나는 그 시점에서 성도를 교인으로 세우기 위해 뭔가 해야 할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죽어라 전도해 겨우 모셔 왔는데 정작 교회에 등록한 후 곧바로 떠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새가족 정착률 100%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저는 한 영혼도 놓칠 수 없습니다. 저는 절대 한 사람도 포기 못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붙잡아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월요일 밤이면 꼬박 밤을 지새우고 강의안을 준비했다. 강의 목적은 하나였다. 교회를 다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어떤 사회생활과 비교해도 신앙생활을 통해 얻는 유익을 따라잡을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치려고 몸부림쳤다. 제자훈련을 한 주에 6팀씩 인도하였다. 전도해온 분들을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매달린 일이었는데 몇 년 안 돼 내 체력도, 의지도 거의 바닥났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훈련을 효과적으로 감당해내지도 못하였다. 몇 팀을 세우는데 5년여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겐 시간이 없었다.

방향을 바꿔 집중강의를 시작하였다. 처음 오신 몇 분을 위해 혼신을 다해 강의하였다.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없다. 진리는 변함이 없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준비한 만큼 결과는 있는 법이다. 10여명 모였던 모임의 숫자가 매주 늘어갔다. 입소문이 나고 있었다. 이 일로 전도 현장에 나가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걱정이었다. 그런데 강의가 유익했다고 이웃을 데려오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년이 지나고 보니 매주 수강생이 150여명이 되었다. 설레는 화요일이 되었다. 참 행복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성도들이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목사님, 이 강의 이름을 화요행복학교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왜요?” “아니 성경학교라고 하니까 안 믿는 친구들이 어렵겠다고 거절해요. 그런데 행복학교 가자고 하면 더 쉬울 것 같아서요.” 그 말이 옳았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었다.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켰고 가정을 변화시켰다. 매주 집중강의는 삶의 현장에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주 간증자가 나타났다. 서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놀라운 역사를 나누다가 공감하고 가까워지고 어우러지는 일들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초대 교회 같은 모습이 회복되고 있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꿈에 그리던 그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찾게 되었다.

이수훈 목사(당진동일교회) / 구본철 기자(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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