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정기발표회

지난 39일 부산진교회 왕길지기념관에서 열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회장 이상규 교수) 36회 정기발표회에서 고신교회가 배출한 학생신앙운동(SFC) 초기 역사가 학술 논문으로 발표됐다. 학생신앙운동 60년사 집필자 나삼진 박사(총회교육원장)는 이날 ‘SFC 태동기 역사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SFC 형성배경, SFC 동력 수양회, 전도운동, 강령의 제정, 초기 활동양상, 전국 조직 형성과 SFC 지도자들에 대해 조명했다. 이번에 발표된 나삼진 박사의 논문은 부경기독교역사연구 제46집과 제47집에 나눠 실렸는데, 이를 요약했다.

SFC의 태동기 역사(1947-1952)에 관한 연구

나 삼 진 박사

(총회교육원장)

SFC 형성 배경이 된 기독소년 하기수양회, 학생신앙협조회, 청소년 신앙운동

해방 후 부산에서 형성된 학생신앙운동(SFC)은 세 가지 배경을 갖는다. ‘고려신학교가 개최한 기독소년 하기수양회부산 영도에서 모인 학생신앙협조회’, ‘한부선 선교사가 이끈 청소년신앙운동(YFC)’.

SFC 첫 번째 배경이 됐던 기독소년 하기수양회1947년 당시 부산의 중심이었던 광복동 용두산공원 입구에 고려신학교 교사를 마련했고, 초기 신학교 운영에 깊이 참여했던 한명동 목사가 한부선 선교사와 논의해 1948년 여름 고려신학교 주최로 기독소년 하기수양회를 개최했다. 둘째, ‘학생신앙협조회1945년 해방과 함께 어른들의 회개운동을 바라보며, 학생들도 일제강점기에 철저하지 못했던 신앙생활을 회개했다. 영도교회 목사 사택과 고려신학교 등에서 모인 이 기도모임은 학생신앙협조회라 이름 했는데, 한명동 목사의 지도하에 손영준 이원홍 한기범 등 14명이 참여했다. 셋째, 한부선 선교사가 이끈 청소년신앙운동(YFC)’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됐다가 1941년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추방된 한부선 선교사는 미국 체류 중 활발했던 YFC를 경험했다. 그는 중국의 공산화로 기도하던 만주 선교가 불가능하게 되자, 부산을 선교지로 정하게 되면서 고려신학교의 교수로 동참했다. 그는 부산에 진주해 있던 미군과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YMCA에서 성경공부 모임으로 청소년 신앙운동(YFC)을 시작했다. SFC는 이 세 지류가 하나로 만나 1948년 학생신앙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SFC의 동력이 된 수양회, 19488월 첫 수양회 개최

초기 SFC는 수양회가 중요한 프로그램이었고, 초기 SFC의 존재양식이었다. 교회마다 목회자가 귀했고,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한 교역자가 거의 없던 시절 SFC수양회는 학생들의 신앙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기회가 됐다. 학생들은 SFC 수양회에 참석하여 출옥성도들의 신앙과 사상을 전수받았고, 이들이 각 지역에 나가 새로운 시대에 교회개혁운동의 불씨가 됐다.

SFC의 첫 수양회는 194882일부터 6일간 고려신학교에서 개최되어, 박윤선 목사, 한부선 선교사, 한명동 목사, 최의손 선교사, 마두원 선교사, 송상석 목사, 노진현 목사, 이상근 목사, 이인재 목사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37명의 고등학생과 중학생 86, 국민학생 10, 기타 22명 등 155명이 모여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 해마다 두 차례 개최된 SFC수양회는 초기 SFC의 동력이 됐고, 학생 스스로 수양회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임원들의 지도력을 훈련시키는 기회가 됐다.

SFC의 강한 특질이 된 불같은 전도운동

SFC는 기독교가 소수이던 당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이는 초기 SFC의 강한 특질이 됐다. 초기 강력한 전도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차 전도운동은 1946YMCA회관에서 모였던 청년신앙운동의 모임에서 관계된 한 미국인 병사가 미국에서 한부선 선교사를 통해 100달러가 전달됐고, 한 선교사는 이 돈으로 전도자를 인쇄하여 부산시내 5만호를 대상으로 학생들이 복음을 전했다. 2차 전도운동은 1949년에 실시됐는데, 한부선 선교사는 1차 전도운동의 결과를 미국의 형제에게 전하면서, 그 형제가 다시 1,111달러라는 큰 액수를 선교비로 보내왔다. 한부선 선교사는 그 돈을 모두 전도운동에 사용하기로 하고, 요한복음(쪽복음)10만부를 인쇄해 대규모 시내 축호전도를 실시했다. 지역에서 시내 목회자들을 초청해 초등학교를 빌려 전도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전칠홍 목사, 한상동 목사, 박윤선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초기 SFC는 불같은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SFC 강령의 제정은 한명동 목사로 이해

SFC1949년 초에 부산과 대구의 신앙운동을 중심으로 강령을 제정하여 운동의 신학과 방향을 설정했다. 오늘날과 같이 완성된 강령은 제10회 수양회지에서 볼 수 있다. SFC강령은 학생신앙운동의 신조, 목적, 사명, 생활원리를 간명하게 정리해 운동원들이 암기하고, 신앙과 운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신조로,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목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 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을 생활원리로 채택한 것이다. 이는 1965년에 제정한 교단교육이념과 목적과 더불어 고신교회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SFC강령은 박윤선 목사가 기초했다는 주장도 있으나(허순길, 남영환 등) 박윤선 목사는 서울대 SFC의 집회에 강사로 와 학생들의 질문에 자신이 SFC강령을 기초하지 않았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볼 때 이를 사실로 볼 수 없다. SFC강령은 한명동 목사가 초기부터 SFC에 깊이 참여하며 지도자였다는 점, 초기부터 SFC정신에 관한 강의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맡아왔던 점, SFC 20주년 기념대회의 강사를 맡아 실제적으로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본인이 제정했다는 증언과 유력한 제정후보자 박윤선 목사가 자신이 기초하지 않았다고 확인한 것을 고려할 때 한명동 목사가 제정했다고 이해한다.

초기 SFC‘학원복음화운동, 문서운동 활발

SFC는 초기부터 학교에 SFC를 조직해 학원복음화운동을 전개했다. 성광회라 이름한 부산사범학교 SFCSFC의 공식적인 산하단체로 활발한 운동을 했다. 성광회는 60여 명의 회원들을 확보했는데, 회가를 정하고, 회보 성광을 간행하면서 공동체의 유니티를 형성했고, 동료 학생들에게 복음전파에 힘을 힘썼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모여 예배를 하면서 신앙운동을 전개했고, 1953년에 238명의 회원들을 확보하게 됐다. 이 같은 시기에 학원 SFC도 대학으로 번져갔다. 연세대와 부산대 등 여러 대학에서 SFC가 조직됐고, 매주 교내에서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모였다.

SFC는 초기부터 문서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수양회를 모일 때마다 수양회지를 발간했고, 1948년에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을 발간했으며, 1953년에는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신문을 발간래 운동을 확대했다. 이후 신문을 계속하여 발행할 수 없게 되자 1955년부터 교단지 파수군을 활용했다. SFC는 파수군 독자모집에 동참하여 전쟁으로 부상으로 인해 후송되어 있던 군인들을 위해 경찰병원, 포로수용소, 육군병원, 장병들에게 100권을 보내어 전도로 활용하도록 했다.

전국 조직 형성과 SFC 지도자들

SFC는 이러한 역사와 과정을 통해 성장했는데, 19506월 한국전쟁 발발로 취소됐던 수양회를 1년 반 만에 재개했고, 1952721일부터 28일까지 제6회 기독학생하기수양회를 개최하면서 독자적인 학생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에 수양회 기간이던 1952727일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준비위원장 이원홍의 사회로 전국대회를 창립하고, 위원장 조용석, 부위원장 이영일, 이복임, 총무 손영준, 서기 황영조, 부서기 및 회계 황창호, 부회계 박성금 등 임원을 선출하여 전국조직을 구축했다. SFC는 학생들에 의해서 전승 계승된 학생자발성으로서 SFC는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SFC는 학생자발운동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뒤에서 밀어주는 원리를 택했다. 초기 지도자들은 한명동 목사(운동), 한부선 선교사(전도), 박윤선 목사(신학), 전영창 선생(행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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